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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수] 노인과 여성으로서의 대처, 그리고 대처리즘이라는 리더십
한 노파가 마트에서 우유를 골라 계산대에 올려놓는다. 영화 ‘철의 여인’의 첫 장면에서 관객은 누구의 얼굴을 볼까. 촌부가 된 전직 여성 총리일까,
치매 걸린 ‘철의 여인’일까, 아니면 최고의연기파 여배우 메릴 스트리프일까, 역사상 가장위대했던 여성 정치가일까. 그것도 아니라면시들지 않은 신자유주의의 영혼일까.
영국 최초의 여성 총리. 1979년에서 90년까지11년간 집권. 노조를 영국병의 근원으로 본강성 보수주의자. 전후(戰後) 복지 자본주의모델인 케인스주의와 결별하고 복지 축소, 규제완화, 공기업 민영화를 과감하게 밀어붙인 시장근본주의자. 영국병을 치유하고 나라를 다시강대국 지위에 올려놓은 영웅. 많은 젊은이를실업과 마약, 알코올의 늪에 빠뜨린 악녀.1979년 보수당의 총수로서 영국 최초의 여성총리로 선출되어 11년간 재직하며 강력한정부의 상징적 인물로 정치판을 누벼왔고전격적인 공기업 민영화 등의 경제 정책을추진하여 영국의 자본시장과 국가 발전에기여한 인물로 평가받는 대처. 그러나 한편으로가난하고 불행한 세대를 말할 때 대표적으로거론되는 ‘대처리즘’, ‘대처의 아이들’이라는부정적 신조어를 낳을 만큼 계층간 빈부 격차를
조장하고 실직자를 양산한 신자유주의적 성향의실패한 인물로 평가받는 대처. <철의 여인>은저 대처의 평가들이 있게 한 정치사를 영화에펼쳐놓는다.
영화에서는 식료품집 둘째 딸 대처가 성별과계급의 장벽을 부수고 영국의 첫 여성총리에오르기까지의 성공스토리가 그려진다. 하지만남성중심 사회에서 그가 느낀 고립감, 권좌에서내려온 뒤 겪는 삶의 무상함, 남편을 잃은상실감이 더욱 부각된다.
1980년대에서 90년대까지의 영국의 정치적사건, 사고들이 대처의 삶을 따라 적절한위로 펼쳐진다. 그로써 영화는 한 정치가에관한 평범한 전기영화가 되기를 자임한다.
다만 이 평범한 전기영화가 은밀하고 꾸준하게강조하는 것이 있긴 하다. 특별히 두 가지를강조한다. 첫째는 대처가 한때는 제국을 호령한철의 여인이었으나 지금은 나약해진 한명의노인이라는 사실이고, 둘째는 그녀가 뛰어난리더십으로 여성의 성공 신화로 말해질 만큼가치있는 삶을 살았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철의여인>은 인생성찰 드라마에 더 가깝게 느껴진다.
대처를 둘러싼 정치적 평가에서도 한발비켜선다. 대처가 매 순간 고독한 결단을내리는 과정에 집중한다. 영화 대사처럼 총리재임 11년은 그에게 “매일매일 전쟁을 치르는삶”이었다. 독단적이라는 비판을 받으면서도이익집단과 여론조사에 끌려 다니지 않고 자신의신념을 관철하는 장면에서는 강인한 리더십이빛난다. ‘대처보다 더 대처 같다’는 평가 속에미국 로스앤젤레스 코닥극장에 열린 올 아카데미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 유력후보로 떠오른 메릴스트립(63)도 대처의 리더십을 적극 평가했다.이번 19대 총선에서 각 정당의 여풍이 강했던만큼 대선을 앞둔 우리 사회에 던지는 시사점도크다. LA타임스 등 외신과의 인터뷰에서 메릴스트립은 대처의 리더십을 새삼 주목하는 이유에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대처는 어려운 결정을 내릴 때마다 지금 당장은미움을 받아도 다음 세대는 고마워할 것이라고말한다. 이게 리더가 명심해야 할 점이다. 리더는당장의 인기를 위해 근시안적 결정을 내리지
말고, 장기적 관점에서 고민해야 한다.”대처와 정치적 성향이 다른 진보주의자인 메릴스트립이 보수정치인인 대처의 정책을 좋아할리는 없다. 그럼에도 정치색에 상관없이 대처가보수적인 영국 정계에서 이뤄낸 일은 높이평가해야 한다고 말했다. 대처는 입만 살아있는정치인은 아니라 자신의 철학에 따라 행동하는정치인이었기 때문이다. 새삼 시대를 이끄는리더십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게 하는 영화임에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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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종] 2. 삼국통일의 비밀, 리더십에서 찾다
7세기 동아시아는 풍운의 시대였다
이 시기부터 한반도의 역사는 동아시아라는 거대한 톱니바퀴와 본격적으로 맞물려 돌아가기 시작하였다. 과거 수백 년 동안 만주와 한반도를 비롯한 동아시아 각국은 다방면에 걸친 상호교류를 통해 서로 불가분의 관계를 맺게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반도의 지도자들도 자국의 운명을 내부 사정만으로 결정지을 수 없게 되었다. 역사에 이름을 남길 지도자라면 당연히 중국과 동북아시아의 여러 민족 그리고 일본의 역동적인 관계를 꿰뚫어보고, 이를 능동적으로 이용할 줄 아는 지혜의 소유자여야 했다.
새 시대의 영웅은 남다른 비전(Vision)을 가진 사람이었다. 설사 현실 여건은 불리하다 할지라도 불굴의 의지로 극복해 나가는 용기를 가진 사람, 오직 그런 지도자만이 7세기 한반도를 휘감은 전쟁의 암운을 걷어내고 자신의 국가와 백성을 건질 수 있을 것이었다.
7세기 중국대륙의 사정은 일변하였다. 오랫동안의 정치적 분열이 막을 내리고 통일왕조가 들어섰다. 수나라와 당나라의 등장이 그것이었다. 중국 천하를 통일한 한족 출신 영웅들은 연달아 고구려를 침공하였다. 전통적으로 고구려는 만주를 비롯한 북중국 일대를 호령한 여러 북방민족의 중심세력이었기 때문이다. 중국의 통일왕조로서는 고구려와의 일전이 불가피하였다. 고구려의 숨통을 끊어놓아야만 그들은 장수를 누릴 수 있었다.
한반도 내부의 사정도 복잡하였다. 동남쪽에 치우쳐 발달이 늦었던 신라가 성장하고 있었다. 6세기 후반 신라의 진흥왕(재위 540-576)은 철(鐵)의 주산지 가야를 손에 넣어 국고를 채웠다. 자신감을 얻은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의 영토를 침범하여 한강유역까지 진출하였다. 신라는 마침내 중국으로 통하는 교두보를 확보한 것이었다. 긴장한 고구려와 백제는 동맹을 맺어 대처하였다. 특히 백제의 위기의식은 더욱 고조되어, 642년에는 신라의 요충지 대야성을 침략하여 성주 품석(김춘추의 사위) 내외까지 몰살시켰다. 신라의 앞날에 적신호가 켜진 셈이었다.
일본도 7세기 후반에는 기지개를 켰다. 덴무 천황(天武天皇, 재위 673-686)이 즉위하여 중앙집권적 국가체제가 정비되었다. 그는 역사상 처음으로 '천황'이라는 칭호를 사용하였다. ‘일본’이라는 국호 또한 그때 생긴 것이다.
한마디로, 동아시아 각국은 저마다 분주하게 움직이면서 틈만 있으면 국외로 팽창할 기세였다. 당시 각국의 지도자들은 위기와 기회라는 양날의 칼자루를 서로 먼저 움켜쥐려고 경쟁을 하였다. 그러나 수나라나 당나라의 황제들이나 일본의 덴무 천황은 진정한 의미에서 역사의 승자로 등극하지 못하였다. 고구려의 전설적 영웅 연개소문(淵蓋蘇文, 665년 사망)도 승리의 여신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는 데 실패하였다. 그들보다 모든 점에서 불리하였지만 뚜렷한 비전을 가지고 승부를 겨룬 신라의 김춘추((金春秋, 태종무열왕, 재위 654~661), 7세기 동아시아의 승리자는 바로 그 한 사람이었다.
연개소문, 도교를 통해 카리스마를 발휘하다
역사가들의 평가는 크게 엇갈린다.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연개소문을 역적이라 비판하였다. 642년 그는 쿠데타를 일으켜 영류왕을 살해하였기 때문이다. 김부식은 또 연개소문에게 고구려 멸망의 책임을 추궁하였다. 유교적인 도덕 사관에 입각한 평가인 것이다. 이와는 달리 20세기 초 한국의 민족주의 역사가들은 연개소문에 대해 찬사를 쏟아냈다.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그를 ‘위대한 혁명가’라 평가하였다. 박은식도 <천개소문전>에서 연개소문의 독립자주정신을 기렸다. 그는 연개소문이야말로 ‘우리 역사상 담력이 제일 큰 사람’이라고 평하였다. 과연 연개소문이 지도한 고구려는 당나라의 연이은 침략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박은식 등의 평가는 틀리지 않았다.
연개소문을 ‘위대한 혁명가’라 평한 것도 일리가 있다. 그는 영류왕을 비롯한 고위귀족들이 당의 압력에 굴복하는 꼴을 참지 못해 쿠데타를 일으켰기 때문이다. 당시 고구려 지배층은 연이은 중국의 침공으로 잠시 방향을 잃었다. 영류왕은 을지문덕 등이 사로잡은 중국인 포로 1만 명을 아무런 조건 없이 송환하였고, 왕세자까지 당나라 조정에 보내 조공을 바쳤다. 독립적이고 자주적인 노선을 지향하는 연개소문이 보기에, 영류왕의 비굴한 외교는 앞으로 더 큰 후환을 초래할 것이었다.
연개소문은 광개토대왕과 을지문덕 등이 남긴 유업을 계승하기로 작정하였다. 고구려가 나아갈 길은 오직 강경한 대중국투쟁에 있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었다. 조상이 물려준 땅은 단 한 뼘이라도 적에게 빼앗길 수 없다. 고구려의 자존감을 지키기 위해 연개소문은 인적 물적 자원을 총동원하였고, 상하 모두를 설득하였다.
이름을 개금(蓋金 또는 盖金)이라 하였던 연개소문은 타고난 군웅(軍雄)이었다. 《삼국사기》에는 그 생김새가 씩씩하고 뛰어났으며 특히 수염이 아름다웠다고 기술하였다. 의지와 기개가 남달라 작은 일에는 얽매이는 법이 없었다고도 하였다. 호방하였던 것이다. 그 가문에 관하여는 여러 가지 추측이 있지만, 아들 남산(男産)의 묘지명에는 고구려의 시조 주몽의 후손이라 하였다. 고구려의 방계 왕족이었다는 말이다. 담력이 뛰어났던 그는 문제의 영류왕과 100여 명의 중앙귀족을 한꺼번에 살해하고, 군사 및 인사에 관한 권력을 스스로 차지하였다.
당시 고구려는 귀족연립체제였기 때문에 분란의 소지가 많았다. 연개소문의 반대파인 안시성(安市城) 성주 양만춘은 영류왕이 제거된 뒤, 군대를 이끌고 연개소문을 공격하였을 정도다. 그러나 연개소문은 양만춘을 설득하는 데 성공하였다. 훗날 당 태종이 고구려를 침략해오자 마지막까지 안시성을 지킨 이가 바로 양만춘이었다. 안시성싸움을 고비로 고구려는 승기를 잡고 당나라 군대를 격퇴하였다.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연개소문이 당태종을 뒤쫓아 만리장성을 넘었다고 하였다. 당태종은 피로에 지친 나머지 병사하였다(649). 제아무리 당나라라 하여도 연개소문이 버티고 있는 고구려를 무너뜨리지는 못하였다.
연개소문은 위기관리에 탁월한 지도자였다. 단호하고 호방한 성품에서 비롯된 그의 지도력은 한때 반대파에 속했던 사람들까지도 대당 투쟁에서 나서게 만들었다. 한 가지 특기할 사항은 연개소문이 종교적 권위를 빌려 지도력을 강화했다는 점이다. 그는 적국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숙달(叔達) 등 8명의 도사를 영입해 도교(道敎)를 후원하였다. 일종의 도교적 전제정치를 시도하였다고 할 수 있다. 어떻게 도교가 정치에 이용될 수 있었을까. 중국의 고소설 <<삼국지>>에도 드러나 있듯, 중국사회를 혼란에 빠뜨린 황건적도 도교신앙을 기반으로 하였다. 고대사회에서 종교와 정치의 관계는 밀접하였다. 전통적으로 고구려 왕실과 중앙귀족들도 불교와 도참설을 빌려 위세를 굳혔다. 그에 반해 연개소문은 도교를 통해 차별화된 자신의 카리스마를 키웠던 것이다.
연개소문은 대당 투쟁을 위해 외교적인 노력도 기울였다. 몽고고원의 설연타(薛延陀)와 연합해 당의 후방을 노렸고, 중앙아시아의 강국(康國)과도 동맹을 꾀하였다. 그러나 646년 설연타가 멸망하자 이렇다 할 후속대책을 세우지 못하였다. 그 틈을 이용해 당나라는 서역과 북방에 대한 지배를 강화하였다. 고구려는 고립을 면치 못하였다. 위기를 더욱 심각하게 만든 것은 연개소문 사후 후계구도의 미비였다. 분란 끝에 연개소문의 장남 남생은 당나라에 투항하였고, 그 아우 연정토마저 신라에 투항하였다.
한마디로, 연개소문은 난세의 탁월한 군웅이었다. 하지만 변화무쌍했던 동아시아의 국제정세에 그가 적절히 대응했다고 평가하기는 어렵다. 평생을 전쟁터에서 보낸 그에게는 장차 고구려가 나아갈 미래의 비전이 없었다. 여기에 후계자 양성까지 실패하고 보니, 이 거목이 쓰러지기 무섭게 고구려 역시 망해 버렸다.
김춘추, 외교와 소통의 리더십으로 역사에 빛나다
그 시작은 참으로 미약하였다. 생김새는 영특하고 어려서부터 제세(濟世)의 뜻을 가졌다지만, 김춘추는 왕위에서 쫓겨난 진지왕의 손자였다. 사실상 왕실의 폐족이었던 것이다. 그래도 그는 굴하지 않았다. 춘추(春秋)라는 그 이름이 말하듯, 언제나 그는 역사에 기대를 걸었다. 바로잡아야 할 과거의 역사, 새롭게 쓰고 말 역사적 사명이 있음을 김춘추는 확신하였다. 역사를 좋아했기 때문인지, 그의 시야는 유달리 탁 트였고, 전략과 전술 역시 풍부하였다.
김춘추의 역사적 통찰은 상식을 뛰어넘는 특이한 문제해결방식으로 나타났다. 가야 왕족출신으로 신라귀족사회의 또 다른 소수자였던 김유신 일가와의 결혼만 해도 그러하였다. 진지왕계와 금관가야계의 연합, 이것은 틀림없는 모험이었지만 결과적으로 가장 탁월한 정치적 선택임이 증명되었다. 선덕여왕 때 김춘추는 김유신의 도움을 얻어 비담(毗曇) 등 구 귀족의 반란을 진압하였다. 덕분에 그는 진덕여왕의 뒤를 이어 신라의 왕이 되었다. 할아버지가 잃은 왕위를 손자가 되찾았던 것이다. 그의 최측근인 김유신은 삼국통일의 과정에서 누구보다 크게 기여함으로써, 그들의 연합이 성공적이었음을 재차 입증하였다.
김춘추 리더십의 가장 큰 특징은 설득과 소통을 바탕으로 한 외교력에 있었다. 648년 그는 당나라를 찾아가 백제공격에 필요한 군사적 지원을 약속받았다. 본래 당나라는 고구려의 정벌에만 뜻을 두었지만, 김춘추의 설득으로 먼저 백제를 치고, 고구려는 나중에 공격하기로 전략을 바꾸었다.
백제정벌을 성사시키려고 김춘추는 고구려 및 일본도 직접 내왕하였다. 역사가들은 그가 이들 두 나라와 동맹을 체결하는 데 실패하였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그렇게 보아 넘길 일이 아니다. 660년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침공할 때 고구려의 연개소문과 일본은 조용하였다. 역사기록에는 자세히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김춘추가 미리 외교적 수완을 발휘해 두 나라의 손발을 꽁꽁 묶어놓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당시 동아시아 주요국가의 최고지도자들을 직접 찾아가서 국가현안을 논의한 가장 적극적인 정치가였다.
김춘추는 그렇게 하고도 남을 전략가였다. 그 당시 신라에 김유신이라는 명장이 있기는 하였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신라는 동아시아에서 군사력이 가장 빈약한 나라였다. 수양제에 이어 당태종까지 연패의 늪에 빠뜨린 고구려는 두말할 필요도 없다. 642년 신라의 요충지 대야성을 유린한 백제도 한 수 위였다. 백제는 659년에도 신라의 변경을 침범하였다. 하지만 김춘추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는 불리한 자국의 처지를 역이용해 당나라를 끌어들였던 것이다. 당나라는 백제와 고구려를 연달아 물리친 다음 신라까지 통째로 삼킬 요량이었다. 그 속셈을 김춘추가 몰랐을 리 없다. 남몰래 그는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까지 동원하여 당나라를 무찌를 준비를 하였다.
여기에 그의 포용력도 한몫하였다. 660년 11월, 백제의 구 관료들이 항복해오자, 김춘추는 그들에게 관등을 주고 관직에 임명하였다. 이러한 포용정책이 있었기에 훗날 신라는 일사불란하게 대당 항전을 벌여 동아시아 국제전쟁의 최종승자가 되었다. 그의 정책을 계승한 큰아들 문무왕(재위 661-681)은 신라의 황금기를 열었다. 그들의 직계자손이 8대 120년 동안 왕위를 계승하며 태평성대를 구가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김춘추 리더십의 중요한 특징은 미래지향에 있었다. 당나라를 다녀온 뒤 그는 내정개혁을 주도하여 자신이 왕위에 오를 때를 준비하였다. 특히 왕의 명령을 집행하는 집사부(執事部)를 설치하여 왕권 강화의 기반을 닦았다. 이방부(理方府)의 시행세칙(格) 60여 조를 개정하는 등 율령을 강화한 것도 특기할만한 일이었다. 즉위 초 그는 왕자들을 주요 관직에 임명하여 친정체제를 굳히는데도 힘썼다. 660년에는 아예 김유신을 상대등에 임명하였다. 이로써 귀족대표라는 상대등 고유의 성격이 일변하여 왕의 정치적 이익을 대변하는 자리로 변화되었다. 역사가들이 감탄하는 신라 중대의 전제왕권은 김춘추의 개혁을 토대로 한 것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그가 외세를 끌어들였다며 눈살을 찌푸린다. 현재의 관점에서는 그럴 수도 있겠다. 하지만 7세기 동아시아의 역사적 현실을 깊이 고려한다면 안 될 말씀이다. 그때 동아시아에는 김춘추처럼 역사를 꿰뚫어본 지도자가 어디에도 없었다. 그의 지혜 덕택에 우리는 사상 최초의 통일국가를 이루어 오늘날의 한국과 한민족을 뿌리가 되었다. 김춘추는 미약한 자국의 미래를 개척하기 위하여 동아시아 최강국인 당나라까지 움직였다. 21세기 복잡한 국제관계 속에서 고민하는 우리로서는 그의 리더십에서 배울 점이 아직도 너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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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스테이플스] 2. Human Development를 위한 퍼실리테이션
모든 사람들은 그들의 집단의 노력을 통해서 좋은 성과를 얻기를 바란다. 예를 들어 회사는 마케팅 캠페인, 소비자의 니즈를 충족시키는 좋은 제품, 대중에게 계속해서 회자되는 훌륭한 이벤트 등을 통해서 높은 판매 수익을 내기를 원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성과나 결과는 반쪽 짜리 스토리일 뿐이다. 이런 가시적인 성과들 뒤에는 이를 가능하게 만드는 “팀”이 언제나 있다. 팀의 스토리가 바로 이런 모든 성과를 이루는 진짜 원동력이자 에너지이다.
퍼실리테이션은 이러한 팀의 스토리의 뒤에 있는 인간의 스토리이다. 어떤 이들은 좋은 리더가 모든 것을 이루는 것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좋은 리더십이란 오직 필수적인 전제조건 중 하나일 뿐이며, 리더십은 방향을 제시하는 역할을 수행한 후, 앞자리에서 혹은 조직의 행보에서 물러나게 된다. 또 어떤 이들은 훌륭한 경영자가 일을 성취하는 것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훌륭한 경영이란 단지 기본적으로 팀이 필요로 하는 시간, 돈, 자원, 직원을 보유하고 있도록 지원하는 것일 ? 물론 이것이 매우 중요한 지원이긴 하지만- 뿐 이다. 퍼실리테이터는 팀에 인간 요소를 더한다. 퍼실리테이션은 팀이 계속해서 뭉치도록 유지해 주는 접착제와 같은 것이며, 에너지를 생성하는 상호작용이고, 필요한 속도를 유지하도록 하는 심장박동과 같은 것이다.
팀의 한 개인이 언제나 구석에 있으면서 주도적으로 행동하지 않고, 직접 질문이 들어오지 않는 이상 절대 자발적으로 의견을 말하지 않으며, 과업이 특정하게 주어지지 않으면 절대 스스로 무언가를 하지 않는 그런 상황을 생각해 보라. 퍼실리테이터로서의 나의 삶을 통해 나는 이런 종류의 사람들을 많이 만나왔다 ? 인도의 부족 마을 사람들, 세계 곳곳의 교육 받지 못한 사람들, 정부의 행정 담당자들, 기업의 업무 담당자들 등. 우리 중 많은 이들 역시 그런 사람이었던 순간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순간은 주도성이나 흥미의 부족 때문에 찾아온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것, 우리의 노력이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모르는 것과 같은 불확실성 때문일 가능성이 더 크다.
뛰어난 퍼실리테이터는 그러한 사람들이 자신 있게 제안하고, 질문하며, 위험을 감수하고, 대안을 제시하고, 권한을 갖고 말하거나 권한을 가진 자에게 말하며, 필요 시 다른 이에게 책임을 지우는 사람으로 변모하도록, 역량 있는 팀원 또는 테스크 포스의 리더로 변화하도록 도울 수 있다. 퍼실리테이션은 팀원들이 서로를 동기부여 시키고 그들에게 계속해서 힘을 실어줄 성공스토리를 창출하도록, 필요에 따라서는 눈에는 보이지 않게 은밀히, 팀을 하나로 묶고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능력이다.
퍼실리테이터는 단순히 결과물에만 관심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팀 전체, 그리고 퍼실리테이터 자신을 포함한 각각의 구성원들에 더 큰 관심을 가진다. 또한 사람들을 성장시켜줄 미묘한 동기들과 에너지에도 큰 관심을 갖는다. 간단히 말하자면, 퍼실리테이션은 Human Development 그 자체이다.
퍼실리테이션은 가장 목소리 큰 사람이나 가장 자신만만한 사람들만이 아닌 모든 이들의 아이디어를 통합하기 위해, 단순한 인내심 이상의 특별한 스킬을 필요로 한다. 자신감이 넘치는 사람에게는 작은 기회 정도만 주어지면 된다. 그러나 다른 이들은 안전한 발언의 환경을 필요로 하며 가끔은 더 많은 보살핌을 필요로 하기도 한다. 그들은 존중 받는, 중립적인, 그리고 안전한 기회와 프로세스를 필요로 한다. 퍼실리테이터는 몇몇 사람들의 강력한 의견을 줄이고, 다른 이들의 의견을 확대할 수 있다. 이것이 잘 될 때, 대화의 변두리에 있는 사람들을 끌어들일 문을 열어주며, 그들이 새로운 여정을 시작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해 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퍼실리테이터에게 관찰, 경청, 커뮤니케이션과 대화가 모두 중요한 스킬인 이유이다.
경청 받는다는 것은 그 자체로 몰입의 첫걸음이다. 퍼실리테이터는 모든 이들이 몰입하도록 하기 위한 많은 툴과 기법들을 갖고 있다. 용기가 없는 사람들을 참여시키는 데에는 설명, 증명 등이 필요하며, 사소한 것일지라도 성공할 때마다 정적 강화(Positive Reinforcement)가 필요하고,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는 비판단적 수정이 필요하다. 퍼실리테이터가 모든 답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며, 모든 것에 대한 최고의 방법을 알고 있을 수도 없으므로, 퍼실리테이터는 팀의 구성원들과의 지속적 상호작용과 학습을 해나가야 한다. 자신이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일지라도 훌륭한 퍼실리테이터에게서는 새로운 통찰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긍정, 해석, 통합, 그리고 퍼실리테이터들이 자주 사용하는 다양한 심성 모형(Mental Model)들을 통해서 말이다
마치 바이올리니스트, 피아니스트, 드러머 등과 같은 다양한 재능들을 통해 훌륭한 음악적 완성을 이끌어 내는 위대한 지휘자와 같이, 퍼실리테이터는 다양한 사람들의 능력과 스킬을 조직해 나가며, 그들이 모두 같은 페이지에 있도록 유지시킨다. 특정한 역할이 없는 사람들 조차도 그들이 어떻게 그들의 몫을 해낼 것이며 그것이 왜 중요한지 깨닫게 된다. 퍼실리테이터는 모든 사람에게 공통의 스토리를 상기시키며, 팀의 여정을 극화해 보여주고, 최종 승리를 향한 계획과 축적을 예행 연습해 줄 것이다. 의미 있는 미팅, 조직화, 타임 라인, 보고 등은 모두 퍼실리테이터의 자본이다.
이 모든 것들을 하는 가운데, 퍼실리테이터는 집단 안 개인의 여정에 계속적으로 민감해야 한다. 어떤 이들은 개인의 여정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어 하기도 한다. 그러나 집단의 작업 중에는 언제나 예상치 못한 갭이 생기며, 채워져야 할 틈새가 갑자기 나타나기 마련이다. 이것이 바로 개인이 성장할 수 있는 순간이며, 그들이 머물러 있던 안전영역을 넘어 새로운 역량의 규준으로 뻗쳐갈 수 있도록 요구함으로써 인간이 발전할 수 있는 순간이다.
집단이 스스로 자신의 승리를 경험하고 축하할 수 있도록, 퍼실리테이터는 물러날 때가 언제인지도 알아야 한다. 자신의 한계 역시 알아야 하며, 새로운 퍼실리테이터가 성장하고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이 생기도록 해줄 수도 있어야 한다. 내가 앞서 언급했던 인도의 부족 마을 사람들 중 몇몇은 지역의 리더가 되어 권한을 갖고 정부 관계자들을 대하며, 내가 이끌었던 미팅 중에 소극적인 모습을 보였던 기업 현업담당자들과 몇몇 행정 담당자들 중 일부는 내가 상상하고 바랄 수 있었던 것 이상으로 훌륭한 퍼실리테이터가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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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키지코리아] Talent 파이프라인에 따른 리더십 아카데미
[기본 배경 및 문제 상황]
세계 최대 규모로 가장 오랜 경험을 가지고 있는 휴양지 리조트 회사인 W사는 리더십 개발을 가장 중요한 전략적 우선사항으로 꼽았다. 이러한 배경은 유기적인 성장과 잠재적 인수가능성, 또 새로운 사업의 혁신 모델에 따라, 부사장급 직책에서 일할 수 있는 적임자가 부족하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진정한 행동변화와 강력한 실리적 성과를 이끌어낼 수 있는 리더들을 개발할 수 있는 접근법을 필요로 하였기 때문이었다. 고위경영진은 조직의 구체적 요구사항을 파악하여 끝까지 실행할 수 있는 ‘책임의 문화’을 추진하고 강조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원하는 것이었다.
[해결 방안]
Linkage는 W사와 협력하여 높은 잠재력을 지닌 리더들이 미래의 Talent 파이프라인을 개발할 수 있는 역량을 갖게끔 하고, 학습과 실질적 사업목표 달성을 결합시킨 맞춤형 리더십 프로그램을 개발하였다. W사 리더십 아카데미는 철저한 니즈 분석과 핵심역량에 대한 강점 및 약점 분석을 통해 개발되었으며, 약 12개월 동안 3개의 세션으로 나누어 진행되었다.
리더십 아카데미에서 참가자는 다수의 학습적 상황과 여러 가지 Tool를 접하게 되는데, 이러한 Tool에는 프레젠테이션, 자가진단 및 360 진단, 그룹과 개인 활동, 시뮬레이션, 실질적인 역량 개발, 성찰과 개발의 기회, 팀 빌딩과 코칭 등이 있다. 매년 W사는 평균 25-28명이 리더십 아카데미에 참가하도록 하고 있다.
리더십 아카데미의 각 세션은 우선적으로 리더십 개발의 핵심적 분야에 주력하였다.
첫 번째 세션에서는 참가자들의 개인의 리더십 역량을 진단한 후 피드백 결과를 받게 하고 그들 각각의 리더십에 대한 접근방법에 대해 정의 내릴 수 있게 해주는 여러 활동에 참가시켰다. 특히 개인의 리더십 개발 계획을 확고히 하는 법을 배울 뿐만 아니라 자기개발과 의사결정, 신뢰구축 및 동기부여에 대한 Best Practice에 대해서도 학습하며 학습한 내용을 현업에서 적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두 번째 세션은 성공적인 팀 리더가 되는 것과 목표를 명확히 하는 것, 성공을 위한 청사진 개발 및 팀 내에서 각자의 역할과 책임을 명확히 구분하고 인식할 수 있도록 지원하였으며 액션 러닝 결과 발표 및 각 개인별로 어려운 문제에 대해 해결방안을 함께 모색할 수 있도록 하였다.
세 번째 세션은 임원 프레젠테이션에 중점을 두어, 실제 난이도가 높은 비즈니스 케이스를 가지고 팀 프레젠테이션의 형태를 활용하여 실행하였다. 각 팀은 조사결과와 비즈니스 해결방안을 고위경영진에게 발표하고 심사위원 패널은 현 상황 분석, 미래 상황 및 Q&A 세션을 포함한 임원 프레젠테이션을 고려하여 각 팀을 평가하고, 복합적 평가에는 팀 멤버들이 서로에게 솔직하고 필요한 피드백을 줄 수 있도록 Peer평가도 포함되었다.
W사 리더십 아카데미에는 또한 지역 의료기관과의 협력을 통해 이루어졌으며 건강교육에 초점을 둔 반나절 프로그램도 포함되었다. 참가자는 신체검사를 받고 또한 일과 생활의 조화 그리고 건강한 식생활에 대해서도 배우게 되었다.
[결과]
리더십 아카데미로 인해 W사는 다음 항목들과 같은 성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1. 전체적인 사업전략과 연결되는 리더십 및 역량개발에 대한 통합적∙체계적 접근법
2. 미래 리더 육성을 위한 강력한 인재육성체계 구축
3. 개인과 조직의 성공을 위해 필요한 핵심 리더십 역량에 대한 조직 내 전 직급의 공통된 이해
4. 전 직급은 물론, 상위 임원들과의 향상된 의사소통
본 프로그램은 구체적인 리더십 역량을 알아내기 위해 핵심 이해관계자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설계되었다.
[프로그램 주요내용]
프로그램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이 구성되었다.
w 360도 피드백에 근거한 자기인식 요소
w 관리 및 리더십 역량 개발을 위한 Practice
w 개인별 코칭
w 현 직무의 이슈에 주력한 액션러닝
w 부문이나 팀 등 단위조직에 따른 사례 연구
w 팀 빌딩
[적용의 시사점]
리더십 파이프라인에 따른 교육 체계를 구축하는 것은 간단히 이루어질 수 있는 문제는 아닐 것이다. 또한 지속적인 실행을 해나가는데 에있어서 CEO와 상위임원급의 많은 참여가 필요한 것이 사실이다. 특히 조직의 전략적 방향과 일치된 관점에서 인재육성체계와 역량개발의 필요점을 찾는 것이야말로 초기 단계의 리더십 개발을 위해 반드시 고려해야 할 중요 요소이다.
조직 전략과의 Alignment를 확보하기 위해 상위 임원진들의 참여와 Commitment 확보가 필수적이다. 중장기적인 관점에서 인재육성 체계를 수립하는데 있어 CEO를 비롯한 얼마나 많은 조직의 상위임원들을 그 과정에 참여시켰는지, 그리고 그러한 과정 속에서 상위 임원들이 얼마나 중요하고 진정성 있는 성찰을 스스로 할 수 있었는지가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그런 면에서 W 사의 본 사례는 시작단계에서 무엇이 중요한 요소인지를 명확하게 파악하여 설계되었고 또한 실행의 과정에서 임원진들의 진정성 있는 학습의 강도를 높일 수 있었던 사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