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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종] 6. 비운의 리더십
역사상에는 탁월한 능력을 가졌지만 그것을 마음껏 펼치지 못한 불운의 리더들이 있었다. 명량해전에서 전사한 이순신(李舜臣, 1545-1598)은 무장(武將)으로 생을 마감하기에는 너무도 아까운 인물이었다. 서인에게 폐위당하고만 광해군(재위 1608-1623) 역시 안타까운 지도자였다. 공적은 많고 허물은 극히 적은 명군(名君)이라서 하는 말이다. 이번 호에서는 비운의 지도자들이 지녔던 능력과 포부, 그리고 그들을 쓰러뜨린 운명을 이야기해본다.
난국을 돌파한 최고의 경영자 이순신
이순신은 난세가 키운 영웅이었다. 이름 없는 하급 무인으로 출발해 40세가 넘을 때까지 제대로 된 자리 하나 차지하지 못하고 지냈다. 그러다 임진왜란을 만나자 그는 국가의 명운을 개척하였다. 그의 탁월한 경영능력 덕분이었다.
이순신은 어느 장수보다 부하들을 지휘하는데 능수능란하였다. 작전지역에서 근무하는 지방관들 및 현지 양반들을 설득하는데도 으뜸이었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그가 백성들의 절대적 지지와 신뢰를 얻었다는 점이다. 전쟁으로 뿔뿔이 흩어진 각계각층을 하나로 묶어 전쟁에 동원하는 놀라운 능력이 그에게 있었다. 이순신만큼 인적 물적 자원을 효율적으로 조직 관리할 줄 아는 사람은 고금에 드물었다.
그의 리더십은 탁월한 공감능력에서 비롯되었다. 광화문 네거리에 우뚝 서 있는 우람한 구릿빛 동상과는 딴판으로 역사상의 이순신은 달빛만 고와도 잠을 이루지 못하는 섬세한 시인이었다.
가. 난세의 영웅 이순신
경영자 이순신의 성공비결은 무엇이었을까? 답은 ‘선비! 이순신’이었다. 그는 꼼꼼한 선비요, 탁월한 문장가였다. 18세기의 실학자 이덕무(李德懋, 1741-1793, 호는 靑莊館)는 역대 한국의 대표 문장가들 가운데 이순신을 포함했다. 간결하고 섬세한 이순신의 문예적 감수성, 이것이 인간이해로 승화된 것이다. 그의 문학적 상상력과 공감능력은 경영능력으로 피어났다.
이순신은 전쟁을 두려워하는 백성들의 공포심은 물론, 터줏대감인 시골양반들의 고충도 십분 이해하였다. 폭넓은 인간이해가 있었기에 그는 각계각층의 친구요, 보호자가 되었다. 그리하여 그 사람들과 함께 힘을 모아 누란의 위기에서 나라를 지켜냈다. 그는 인간경영에 성공하였기 때문에 불패의 신화를 쓸 수 있었다.
여기에 경계할 점도 있다. 그에게도 단점은 있었다. 우선 경쟁심이 지나쳤다. 그는 원균과 공을 심하게 다투느라 불필요한 잡음을 불러일으켰다. 또 어떨 때는 부하들에게 너무 가혹했다.『난중일기』곳곳에서 우리는 부하들을 사납게 매질하고 백성들의 목을 베는 이순신을 만난다. 그러면서도 그 자신은 상관의 명령에 그리 복종하는 편도 아니었다. 오랫동안 그가 미관말직만 전전한 데는 이러한 약점들이 작용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약점을 충분히 극복하고도 남을 만큼의 장점을 소유하였다. 그래서 구국의 영웅이 된 것이다.
나. 이순신, 전쟁을 준비하다
전운이 감돌자 이순신은 우선 전함부터 만들기 시작했다. 거북선도 지었다. 가까스로 거북선이 완성되었을 때 임진왜란이 터졌다. 그 완공이 조금만 더 늦었더라면 조선의 역사는 영영 그릇되고 말았을지도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이순신은 무조건 싸우고 보자는 식의 맹장이 아니었다. 피차가 구사할 수 있는 모든 전략전술을 미리 부하들과 함께 다각적으로 검토한 다음 아군의 승산이 충분하다고 판단될 때만 출격명령을 내렸다. 그래서 이순신의 부하들은 포탄이 비 오듯 쏟아지는 전장(戰場)에서도 언제나 침착하였다. 사전에 전술을 충분히 협의하고 공유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우왕좌왕하는 적이 없었다. 전략의 공유와 소통이야말로 이순신의 승리제조기였다.
그는 스스로 군량을 확보하였다. 농지개발이 제대로 되지 않은 빈 땅을 찾아 수군이 직영하는 농장을 설치했고 그의 부하들은 틈날 때마다 물고기도 잡고 미역, 전복도 땄다. 왜란 중에 다른 장수들의 휘하에서는 굶어죽는 병사들이 속출하였지만 만반의 준비를 갖춘 이순신의 수군은 무사하였다. 권율과 원균 등은 군량부족으로 애로를 겪었고 그때마다 이순신의 도움을 받았다. 심지어 그는 굶주림을 호소하는 양반들과 일반 백성들에게도 자주 은전을 베풀었다. 이순신은 경영의 귀재였다.
『난중일기』를 보면 경영자 이순신이 보인다
이순신은 활을 든 선비였다. 『난중일기』에서 우리는 그런 이순신을 만날 수 있다. 이순신은 호랑이처럼 엄격하면서도 어머니처럼 자상하다. 자상하고 친절한 사람은 대개 엄격할 수가 없다. 하지만 이순신은 양면적이었다. 이순신다움이 여기 있었다.
그는 강철 같은 체력의 소유자도 아니었다. 자주 아팠다. 아파도 오래오래 끙끙 앓았다. 『난중일기』를 보면 그가 칼을 빼들고 검술을 연마했다는 구절은 보이지 않는다. 그는 활시위만을 당기고 또 당겼다. 활쏘기는 공자가 강조한 선비들의 수련 과목이었다.
나이가 들어서는 인맥관리도 잘했다. 수백 개의 부채를 미리 만들어두었다가 요로의 대신들에게 선물로 보냈다. 유자 또는 귤을 대신들에게 보내기도 하였다. 이순신은 지기 유성룡뿐만 아니라 자기를 위험에서 구해준 정탁 등 20명가량의 조정 대신들과 늘 편지를 주고받았다. 그는 명나라 장수들도 잘 어루만졌다. 선물공세와 기 싸움으로 그들의 오만을 평정하였다.
이순신의 승리는 선비정신에서 비롯되었다. 그의 문사적 기질이 소통과 공유의 리더십으로 표현되었다. 인간이해를 바탕으로 한 그의 경영은 언제나 성공을 보장했다. 만약 그가 다시 태어난다면 우리나라를 중흥시키고야 말 것이다. 이순신은 세종의 또 다른 모습이었다.
비운의 위기관리자 광해군
광해군은 왕조재건에 목표를 두었다. 임진왜란으로 온 나라가 쑥대밭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당시 국제정세는 조선이 불리하기 짝이 없었다. 명(明)-청(淸) 교체기를 맞아 광해군은 실용적 외교 전략을 구사했다. 광해군이 후세에 높은 평가를 받는 이유다. 하지만 정치가 광해군은 결국에 실패하였다. 그가 국정파트너로 삼았던 대북파는 편협한, 소수파 정권이었다. 다수파를 권력에서 소외시킨 그들은 인조반정(仁祖反正)이라는 역풍을 맞아 침몰하였다. 실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가. 임진왜란을 통해 성장한 광해군
광해군이라면 아직도 폭군으로만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를 축출한 인조반정 세력은 ‘폐모살제’(廢母殺弟)’ 즉, 인목대비(1584-1632)를 폐출하고 이복동생 영창대군(1606-1614)을 죽였다는 도덕적 비난을 퍼부었다. 아울러 명나라를 배신하고 만주족을 가까이했다는 혐의도 광해군에게 씌웠다. 궁궐을 중수한다며 재정을 낭비하였고, 그 과정에서 풍수지리설을 지나치게 믿었다는 점도 도마 위에 올렸다. 요컨대 패륜과 실정 끝에 광해군은 몰락하고 말았다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비난은 역사적 사실과 달랐다. 광해군은 국난극복에 가장 크게 공헌한 왕이었다. 그는 왜란 중에도 큰 공을 세웠다. ‘권섭국사(權攝國事)’로서 그는 조정의 일부 기능을 위임 받아 평안도, 강원도, 황해도 등지를 순회하며 민심을 수습하고 군사를 모집하였다. 한양이 수복된 다음에는 수도방위도 책임졌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이번에는 전라도와 경상도로 내려가서 군량과 군대를 모으고 무기를 조달하였다. 『난중일기』를 보면 전라도에 내려온 광해군이 이순신에게 장창(長槍)의 제작을 부탁했다는 내용도 있다. 이처럼 광해군은 일신의 위험을 무릅쓰고 조선팔도를 누비고 다니며 국난극복에 온 힘을 쏟았다.
나. 우선 무너진 왕조를 재건하자
우여곡절 끝에 옥좌에 오른 광해군은 전란으로 무너진 왕조의 기강을 세웠고 재건에 필요한 사업을 강력히 추진하였다. 가령 1608년부터 경기도에서 대동법을 실시한 것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그때까지는 각 지역의 토산물을 공물(貢物)로 바치는 공납제가 존재하였지만 법을 시행한지 오래되어 폐단이 심했다. 왜란 중에 그러한 모순을 직접 목격한 광해군은 왕이 되자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잘못을 바로잡으려고 애썼다. 백성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서였다.
광해군은 같은 맥락에서 양전(量田)사업도 단행했다. 임진왜란 때문에 인구이동이 심했고 황폐된 농지도 많았다. 더구나 전쟁 중 토지대장이 불타버렸기 때문에 세금을 정확하게 거둘 근거도 상실되었다. 이 역시 힘없는 백성들에게 큰 불편을 초래하였다.
광해군의 머릿속에는 늘 한 가지 생각이 자리했다. 백성들의 안위가 우선이었다. 실록에서 만나는 광해군은 성격이 침착하고 사려 깊은 왕이었다. 그는 현안을 여러 신하들에게 일일이 물어보아 백성들의 입장에서 결정하였다. 그는 늘 백성의 편에 선 왕다운 왕이었다.
다. 실리외교의 귀재
광해군은 국제적인 분위기에 민감하였다. 당시 한반도 북쪽에서 큰 소용돌이가 일어나고 있었다.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는 갈등이 생겨 마침내 전쟁으로 발전하였다. 광해군은 신중하였다. 그는 중국사정을 정확히 인식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였다. 민감한 그들의 내부사항도 일일이 탐지하였다. 아울러 만약의 경우에 대비하여 광해군은 국경선 지역에 군사력을 증강 배치하였다.
광해군은 남쪽의 일본도 놓치지 않았다. 일본이 재침략해올 기미는 없는가를 신중히 살폈다. ‘기유약조’라는 조약을 체결해 평화를 정착시켰다. 전란 중에 포로로 끌려간 백성들도 되찾아 왔다. 돈을 주어서라도 반드시 우리 백성을 데려오는 것이 광해군의 뜻이었다.
광해군이 성리학적 명분에 얽매였다면 그처럼 유연한 외교 전략을 구사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왜란 때 명나라가 조선을 도와주었던 만큼 조선도 무조건 명나라를 도왔어야 했다. 그러나 광해군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싸워봤자 질 것이 틀림없는 명나라를 위해 조선의 백성을 희생시킬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광해군에게 소중한 것은 조선의 백성뿐이었다. 전란으로 죽고 다치고, 전염병과 굶주림으로 쓰러지고, 적군에게 포로로 잡혀 조국과 가족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가엾은 백성들을 그는 잊지 않았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백성을 살리는 것이 광해군의 목표였다.
라. 실패한 비운의 리더
그는 훌륭한 왕이었지만 그에게도 약점이 있었다. 그는 서인과 남인 등 조정에서 소외된 정파들을 적절히 회유하지 못했다. 만일 제거해야 할 대상이었다면 과감히 숙청했어야 한다. 그런데 반대파를 제거하는데도 어설펐다. 결국 화근만 키워놓은 꼴이 되어 인조반정이 일어났다. 이로써 광해군은 왕좌에서 축출되고 말았다.
소통과 공감, 연대와 조화를 중시한 세종은 매사에 백성의 입장을 최우선적으로 고려하였고 그리하여 전례 없는 성공을 거두었다. 광해군 역시 거의 성공할 뻔 했다. 하지만 반대파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 범용한 여러 왕들보다 오히려 못한 처지가 되었다.
뜻이 좋다고 언제나 결과가 좋게 나오지는 않는다. 인사가 만사라는 말도 있듯, 믿을만한 사람을 등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요즘도 거듭된 측근비리에 공천비리로 온 나라가 휘청거리고 있지 않은가. 경영자들은 광해군의 실패를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한다.
글 백승종 마을공동체문화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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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호영] 인재육성을 통한 혁신, 교육을 마케팅화하다
동양증권은 올해 5월, 지식경영과 교육기능의 유기적 결합, 소통 활성화, 전 직원의 자산관리 역량 강화를 목적으로 가치경영센터를 신설했다. 즐거운 변화를 선도하는 가치경영센터는 인재경영팀과 기업문화혁신팀이 핵심가치를 중심으로 가치경영의 토대를 마련하고 있다. 기존 인재개발팀에서 인재경영팀으로 명칭을 바꾸고, 기업문화혁신팀을 맡았던 박호영 팀장을 인재경영팀장으로 영입하면서 또 한 번 혁신을 감행하고 있다. 혁신의 중심에 선 동양증권 인재경영팀 박호영 팀장의 인재경영전략을 엿보았다.
핵심가치 기반의 기업문화를 조직에 내재화하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도구는 프로그램, 제도, 교육이다. 그중에서도 혁신을 위한 도구 중 가장 중요한 요소로 꼽히는 ‘교육’을 진두지휘하는 박호영 팀장의 어깨가 무겁다.
“회사에 불이 꺼지면 자산가치는 0이 된다는 말을 자주 사용하시는 회장님의 말처럼, 증권업에선 사람이 전부입니다. 치열한 생존 경쟁 속에서 그 경쟁우위는 인재육성에 있다는 말일 것입니다. 그만큼 인재경영팀장으로서 중차대한 책임감과 사명감을 느낍니다.”
그래서 박 팀장은 직원이라는 내부고객을 상대로 고객상품을 마케팅 한다는 각오로 임하고 있다. ‘교육을 시킨다’는 관점에서 직원의 니즈를 파악해 직원에게 필요한 교육을 하고자 함이다.
“우리 업무 고객은 ‘직원’입니다. 팔리는 교육, 고객에게 필요한 교육을 위해 사내 인트라넷 배너 광고 및 구전마케팅 등을 활용하여 교육 마케팅을 하고 있고, 교육 상품에 브랜드 개념을 넣어 신지식을 공급하는 데 주력하고 있습니다.”
Marketer에서 HRDer로!
사실 박 팀장은 HRD 전공자가 아니다. 그러나 박 팀장이 마케팅을 비롯해 영업, 기업문화, 교육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할 수 있었던 것은 도전정신과 배움에 대한 열정, 또 교육의 힘이 컸다.
“마케팅을 하다가 나이 40에 지점영업에 도전했습니다. 유답현장(有答現場), 즉 현장에 답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마케팅 정책을 수립하고, 기업문화를 혁신하고, 직원들을 교육하기 이전에 실제로 회사의 근간을 이루는 영업직원들이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채우는 학습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마케팅 업무를 하면서도 ‘혁신’을 공부했고, 동양증권에 인재개발팀이 생긴 이후로 실시된 교육이란 교육에는 다 참여했을 정도다. 이는 박 팀장이 인재경영팀장으로 부임한 후에도 계속되고 있다. 매주 목요일이면 인재경영팀 전원이 모여 ‘목요 세미나’라는 이름으로 학습한다. 교육을 기획하고, 운영하는 이들이 먼저 공부하고, 직원들이 찾아 듣고 싶은 교육 과정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다.
직무능력뿐만 아니라 금융 지식도 업그레이드
"인재경영팀은 기존 직무능력 향상 위주의 교육과 함께 직원의 부를 창출하고, 직원의 행복이 고객의 행복으로 이어질 수 있게 하는 역할을 하나 더 맡았습니다. 이를 위해 지난 7월부터는 Rich Together Program을 통해 임직원의 금융 아이큐 향상과 자산관리 역량 증진에 힘쓰고 있습니다."
Rich Together Program은 기본적인 재테크 상식부터 변액보험과 펀드와의 비교 등 증권회사에서 다루는 업무, 그 외에도 부동산 경매 비법 등 자산관리 방법에 대한 모든 영역을 직원들의 입장에서 가르치는 프로그램이다.
또한, 조직 소통과 전문성 향상을 위해서 지난 6월부터 3가지 과정을 새로이 시작했다. 임원 및 팀장을 대상으로 사내 리더들의 통섭적 경영 인사이트 향상을 목적으로 한 TY포럼과 일과 삶의 균형으로 GWP를 실현하기 위한 TGIF 런치 특강, 명강연을 추려내 임직원이 쉽게 보고, 지적 자극을 통해 신선한 아이디어를 공급하기 위한 T.O.P(Tongyang Open knowledge Platform) 까지 동양증권의 가치경영을 가장 먼저 실천하고 있다.
HRDer, 자기 일에 가치를 느껴라!
박호영 팀장이 인재경영팀원들에게 강조하는 것은 ‘자기 일에 가치를 느끼라’는 것이다. ‘HRD 부서는 3D, 관행, 관성적으로 해온 관리 업무만 하면 된다’는 것이 아니라 모든 교육 기획을 전략기획화하여 자기 역량을 최대한 발휘하고, 자기 일에 가치를 느끼면서 즐겁고, 신나게 일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그래서 고안해낸 것이 ‘개그토크 회의’다. 모든 기획에 대해서는 재미있는 아이디어 회의인 개그토크 회의를 거쳐 팀원들과 재밌는 분위기 속에서 아이디어를 자유롭게 공유함으로써 집단지성을 활용하도록 하는 것이다.
“업무에 대한 지식이나 역량은 기본입니다. 그러나 일에 대한 열정을 갖춘 창조적 인재, 즉 창재(創才)가 제가 생각하는 인재의 모습입니다. 시키는 일을 잘하는 것이 아닌, 기본을 응용하여 더더욱 복잡 단단해지는 경영환경 속에서 자신 업무에 대한 열정과 창조적인 도전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Future 10, Acts 5’. 미래 10년 동안 경쟁우위를 공고히 할 수 있는 행동 5가지를 정의한 것이다. 박 팀장을 비롯한 인재경영팀원이라면 ‘Future 10, Acts 5’를 매일 한 번 이상 말하고, 또 실천하기 위해 고민을 거듭한다. 이 같은 실천사항 속에서 직원들이 찾아 듣고 싶은 교육과정을 만들어내는 것을 목표로 전문 자격증 취득률 향상, 임직원의 금융지식 향상, 직무전문가 육성, 다양한 신규과정 개발, 교육 성과평가 시스템 구축이라는 구체적인 목표 속에서 직원들에게 더 나은 서비스를 제공하고자 하는 결연한 의지가 돋보인다.
진정한 교육은 혁신에서 나온다
박 팀장이 최근 고민하고 있는 것은 교육체계 개선 및 효율성 증대를 위한 교육 성과평가 방법 개선이다.
"교육기능이 각 사업 부문에도 분산되어 있기 때문에 교육 만족도 조사의 틀도 경우마다 조금씩 다른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현재 회사의 실정에 맞는 성과평가제도 개편안을 도입하고 있습니다. 체계적이고, 통일된 기준에 의한 객관적인 평가지표를 마련하여 경영성과에 의한 기여도를 정량적으로 측정하고자 합니다."
HRD 업무를 시작한지 불과 3개월 정도밖에 되지 않았지만, HRD에 대한 열정은 30년간 이 업을 해온 카리스마가 느껴지는 박 팀장. 회사생활을 해온 20여 년간 줄곧 혁신가로 자리매김해온 그는 교육을 통한 혁신을 꿈꾼다.
“기업의 성장과 발전은 결국 변화와 혁신에 달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변화와 혁신의 주체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올바른 인재 육성이야말로 진정한 혁신을 이끌어내는 힘입니다. 이제는 인재경영팀장으로서 교육을 통한 혁신, 즉 근본적이고, 장기적으로 직원들 가치관을 변화시킬 수 있도록 이끌고 싶습니다.”
글 김보석 기자 사진 김현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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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석환] 건전가요 부르기’ 선구자 전석환 선생
‘작은 고추가 맵다’는 한국인의 근성을 2012 런던올림픽에서 여과 없이 보여준 우리나라는 6·25 전쟁이 끝난 직후 1인당 국민 소득이 60달러 정도밖에 안 되는 가난한 나라에서 현재 1인당 국민 소득 2만 달러가 넘을 만큼의 경제 성장을 이뤘다.
국가적 시책인 경제사회발전 5개년계획을 시작으로 정부와 국민이 하나 되어 ‘잘 살아보세’를 외쳤던 그때, 조국 근대화를 목표로 가난을 극복하기 위해 유일한 경제 활동인 ‘일’에 찌들고 지쳐있었던 국민에게 혜성처럼 나타나 흥과 힘을 돋아준 공로자, 희망적인 건전가요 부르기 보급으로 국민 모두에게 희망을 심어준 빛의 전령사인 작곡가 전석환 선생을 만나봤다.
KBS<삼천만의 합창>, CBS-Radio <백만 인의 노래>, MBC-TV<노래는 즐거워> 등 라디오, 텔레비전할 것 없이 모든 매체를 석권해 지휘봉을 들고 노래를 지휘한 전 선생은 짧은 스포츠머리에 훤칠한 키, 호남형 외모로 노래뿐만 아니라, 국민의 정서까지도 지휘했다.
기독교청년회의 약칭인 YMCA는 1964년 ‘싱어롱 with Y’라는 가창 운동을 시작했고, 이것이 전 선생이 시작한 모임인 ‘싱어롱 Y’로 알려져서 다 함께 노래 부르기 운동으로 정착됐다. 당시 ‘캠프송’과 ‘포크송’에는 ‘싱어롱 Y’를 이끈 전 선생의 노래가 빠짐없이 실렸다.
“산업교육은 현재 한국 경제 성장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지금도 그 당시 함께 수고했던 분들이 자랑스러워요.”
건전가요 부르기로 인해 한국레크리에이션의 선구자란 호칭으로 불리는 전 선생과의 인터뷰는 산업교육의 활성화를 불러일으켰던 새마을운동 당시에 대한 회상으로 시작했다. 전 선생은 “70년대 초에 새마을운동에 발맞추어서 산업교육을 했기 때문에 한국의 경제가 좋아진 것”이라며, 새마을운동의 생명은 실천이라고 강조한다.
“당시 마을마다 독농가라고 독실한 농촌의 지도자를 세웠죠. 산업교육이 탄생하기 전에 새마을운동이 시작된 것은 기막힌 타이밍이에요. 공장 새마을운동에서 교육하는 근면, 자조, 협동. 이것이 회사에 얼마나 좋아요!”
레크리에이션의 핵심은 분위기 조성이라고 말하는 전 선생의 대표적인 강의 주제는 정서 교육으로, 노래를 통해 레크리에이션의 첫 문을 열고 모두가 동참하는 분위기를 만들어 산업교육에 빼놓을 수 없는 감초 역할을 했다. 덕분에 문명과 문화가 잘 조화된 이 시대 합작품이 만들어졌다.
봉선화에 의구심?
‘아름다운 노래 정든 그 노래가 우리 마을에 메아리쳐 오면 어둡던 내 마음 멀리 사라지고 나도 모르게 노래 불러 봐요…(생략)’
전 선생의 노래 철학과 색을 가장 잘 보여주는 곡 <정든 그 노래>의 한 소절이다. 일제 침략과 6·25전쟁, 처참할 정도로 가난에 찌들어 패배주의에 빠져있던 국민에게 어둠은 곧 가고 새날이 올 것이라는 희망적 메시지를 전달한다. 국가, 사회, 국민이 하나 되어 어려운 경제 난관을 극복하고, 잘 살아보자는 마음이 움틀 때, 긍정적인 가사의 노래로 온 국민에게 좋은 미래를 꿈꿀 힘을 심어줌으로써 국민의 사기를 높이는데 일조한 것이 전 선생의 공로이다. 시대적 필요와 문화의 힘이 이루어낸 업적이었다.
요즘 젊은이들의 노래에는 포지티브보다는 네거티브가 많다며, 현시대 가요를 우려하는 전 선생에게 한국인의 정서에 깔린 한 때문이 아니겠느냐고 기자가 반문하자 관점의 차이라고 답한다.
“홍난파 선생이 봉선화의 싱싱한 생명을 보고 민족혼을 살리려 ‘울 밑에선 봉선화야 네 모습이 아름답다’고 작곡했다가 일본 경시청의 검열로 ‘네 모습이 처량하다’가 된 거에요. ‘아름답다’고 했다가는 잡혀가 죽었어요.”
일본의 문화말살 정책 속에는 조센진이 부르는 노래를 전부 네거티브로 바꾸고자 하는 의도가 포함되어 있었다. 일제강점기 36년 동안 그러한 정책이 한국을 계속 지배했다고 하니, 현시점에서 표현의 자유를 통해 네거티브의 가사를 전달하는 청춘의 모습이 그 시대를 살아온 어른으로서 우려되는 것이 당연하다.
“새마을 운동 때, 제일 많이 불린 노래가 <좋아졌네>예요. 그때는 좋아진 것도 없을 때이지만, ‘앞으로 우리나라에 다음 세대들은 좋은 일이 많이 생겨야 한다. 이것은 하나의 작품인데 나만을 위해서 노래를 만들지는 못한다’는 생각에 10년, 20년, 30년 후에도 우리나라가 부를 수 있게 하려고 만든 노래입니다.”
우리나라 젊은이들의 미래를 걱정하는 전 선생은 문명의 조건과 문화의 조건을 잘 융합해서 인재를 어떻게 양성하느냐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레크리에이션에 앞의 re가 다시라는 뜻이고, 뒤의 creation은 창조한다는 의미로서 레크리에이션이란 새로운 것을 계속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것을 반복해서 창조해나간단 이야기라고 한다. 갔던 길을 되돌아오는 리턴이 아니라 갔던 길을 어떤 형태의 길로도 돌아오는 유턴이 되라고 말하는 전 선생은 자신이 축복을 받았던 시점의 상황으로 되돌아오는 것. 그것이 이 시대에 필요한 정신이라고 주장한다.
대중교통 수단인 버스에서 앉아 듣는 음악을 잘 활용하면, 사회 분위기가 바뀔 수 있다고 말하는 전 선생의 말처럼, <좋아졌네>에 나오는 ‘좋아졌네 좋아졌어 몰라보게 좋아졌어 이리 보아도 좋아졌고 저리 보아도 좋아졌어. 비단 같은 우리 강산 푸른 나무가 하하’란 가사처럼 우리나라 앞으로의 미래가 언제나 하하거리길 소망한다.
글/사진 김현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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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수] 당신의 심장을 두드린다
당신의 심장을 두드린다
“둥두르르 둥두르르” 항아리를 두드리며, 물이 튀는 환상적인 장면과 리듬이 주는 비트. 1997년 10월 10일 한국인의 심장을 뛰게 한 넌버벌 공연이 다음날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었다. 호암아트홀에서 한 ‘난타’공연이 신선한 장르를 필요로 했던 관객의 심장을 마구 난타했기 때문이다. 사물놀이에 익숙한 한국인에겐 신명 나는 흥을, 아시아에 색다름을 원했던 세계엔 스톰프에서는 볼 수 없는 멋진 드라마를…….
요리를 소재로 당신의 심장 박동수와 같게 두드리는 공연 ‘난타’의 초창기 멤버 김문수 배우를 만나 그 신명의 근원인 팀워크 얘기를 들었다.
공연 위에서 신명 나는 팀워크를 자랑하는 난타의 열정과 몰입도, 집중력과 흥이 조직의 팀워크에서 일어난다면, 얼마나 큰 성과를 불러올지 짐작 할 수 있다. 이를 알아챈 몇 몇의 기업에서는 이미 공연을 보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직원이 직접 난타를 경험케 해 팀원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는 일을 하고 있다.
신명 나는 팀워크의 비결은 일상 속 유쾌한 대화
난타의 타악기를 두드리는 소리는 사람의 심장 박동 박자와 흡사하다. 아기가 태아에서 엄마의 심장 소리를 들을 때, 최상의 평온함을 느낄 수 있는 것처럼 난타와 관객의 완벽한 호흡의 일치. 난타와 관객이 비트에 몰입되는 순간, 난타와 관객은 하나가 되어 공연한다. 난타만의 저력이다.
무대 위에서 어떻게 이런 소름 돋을 정도의 완벽한 팀워크가 발휘 되냐고 기자가 질문하자, 그는 지방 및 국외 출장 등으로 무대 위 시간보다 일상에서의 시간에서 부딪힐 일이 많은 난타 조직의 특성상 무대 밖에서 작품 얘기는 안하고, 주로 일상의 유쾌한 이야기를 나눈다고 한다.
“일상에서 유쾌해야 무대에 올라갔을 때, 유쾌하다”는 신념을 가진 그는 “단합이 되기 위해 일상에서부터 신뢰하고 함께 무대에 서는 것이 중요하다”고 답한다.
난타 등장인물은 총 다섯 명으로 여 주방장, 섹시 가이, 매니저와 그의 막내 조카인 네퓨 그리고 헤드로 구성된다. 네퓨가 낙하산 타고 들어와 벌어지는 해프닝이다.
처음에 난타는 태극기의 블루, 화이트, 레드, 블랙 총 네 팀이었다가, 지금은 그린, 오렌지, 네이비, 브라운, 퍼플, 옐로우까지 총 열 팀으로 늘어났다. 그는 화이트 팀 매니저이다. 매니저라는 호칭이 신기하다. 이를 묻자, “무대에서는 모두가 동등하게 연기하기에 특별히 리더가 의미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역할 상 가장 오래된 경력자가 팀을 관리하는 매니저가 된다”고 한다.
팀의 아이디어를 하나로 모으는 힘
1996년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렸던 한 전시회. 망가진 청소기, 냉장고 등을 갖고 타악기 퍼포먼스를 선보이는 이가 있었는데, 그가 바로 김문수 배우였다. 이 소문을 들은 송승환 PMC프로덕션측에서 함께 일하자고 제안한다. 이렇게 그의 15년 난타 인생이 시작된다.
처음에 난타는 송승환 대표를 주축으로 김문수 배우와 팀원들의 열띤 회의 속에서 나오는 아이디어로 ‘요리’라는 소재를 선택하게 되었고, 김문수 배우의 강력한 주장 때문에 단순히 퍼포먼스를 보여주는 공연에서 그치지 않고, 탄탄한 드라마의 넌버벌 공연이 완성됐다. 덕분에 난타에는 요리와 타악기란 형식에 탄탄한 드라마까지 합세해 기존에 있었던 스톰프 공연에서도 볼 수 없는 창작품이 탄생했다.
이런 좋은 아이디어를 구하기 위해 난타 팀은 매번 새로운 멤버를 영입해 팀을 늘려가고 있다. 기자가 그 많은 아이디어를 어떻게 취합하는지 묻자, 자신이 맡은 일 외에 간섭하는 것은 철저히 배제한다고 한다. 결국, 많은 팀원의 의견을 듣지만, 최종적으로는 담당자의 결정을 믿고 따른다는 이야기이다.
존경받는 리더의 필수 조건 ‘솔선’
그는 작은 소품 하나도 자신의 손으로 챙기고 솔선하는 리더이다. 그렇기에 그가 이끄는 화이트 팀은 불화가 없다.
그의 리더십을 배우고 싶다고 하자 그는 “리더는 ‘조력자’입니다. 함께 힘을 내서 같이하는 것이죠. 제가 선배라고 해서 안 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더 열심히, 함께해야만 후배들이 저를 따라오고 함께 힘을 내서 할 수 있습니다”며, “요즘 친구들은 나이가 많거나 선배라고 해서 존경을 주지 않아요. 자신이 존경할만한 사람이라고 인정할 때 주는 선물이 존경”이라고 한다.
조직 문화에 난타가 줄 수 있는 유익이 무엇인지에 대해 마지막 질문을 하자, 그는 ‘남자의 자격’을 예로 든다. “무슨 일을 하든, 나이가 어떻든 상관없이 다양한 사람들이 합창하자 음악을 매개로 아름다운 하모니가 이루어졌다”며, “이것이 문화의 힘이고, 난타가 세계화된 힘은 ‘김치’에 있다”고 한다. 김치는 가장 한국적인 것. 한국인의 정체성을 찾는 것. 그리고 김문수 배우 그 자신을 찾는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난타는 사물놀이를 통해 우리의 가락을 만든 선조의 소리를 포스트모더니즘적 시각으로 재해석한다. 북, 장구, 징, 꽹과리를 도마, 칼, 항아리, 스틱으로 연주하는 난타 팀을 보며 한 광고 카피가 떠오른다. “우리 것이 좋은 것이여”
글/사진 김현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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