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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개 공공기관, 2012년 인재개발 우수기관으로 인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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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은식] 삶은 축제
행복을 강의하는 문은식 포웨이 행복연구소 소장은 어떻게 하면 더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을지 이야기한다.
별똥별이 떨어질 때 소원을 빌면 이루어지는 이유는 별이 떨어지는 순간 0.3~4초 그 찰나에도 생각날 만큼 평소 간절하게 바라는 것을 빌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그는 행복 멘토이자 상담심리전문가이다.
주부에게는 자녀교육과 아름다운 삶을 위한 행복특강으로, 직장인에게는 삶의 완성과 성숙을 위한 통합적 행복론으로, 창의적 직업 종사자에게는 스토리텔링을 통한 창의적 혁신 활동으로 다가가는 등 대상에 따라 다른 소주제를 갖고 행복을 전한다.
포웨이 행복연구소에는 다양한 치유프로그램에 통해 “자살 시도를 멈추고, 우울증에서 회복한 사람의 사례가 부지기수이다.
월간HRD/어떻게 행복을 주제로 강의하게 되셨나요?
문은식 소장/고등학교 때, 술주정뱅이에 바람둥이 아버지를 두었습니다. 제 마음에 응어리가 있다 보니 대학에 가서 다양한 치유 프로그램에 참여하며 행복에 대해 연구하게 되었죠. ‘삶을 통해 어떤 것이 진정한 행복일까?’이란 근본적인 고민을 하게 됐습니다.
월간HRD/셀프 커뮤니케이션을 하신다고요.
문은식 소장/저의 경우 셀프 커뮤니케이션으로 자가 치유를 했습니다. 편지를 쓰는 것도 자신의 감정을 정화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직장생활을 하다가 잊고 싶은 기억이 생길 때, 팁을 주겠습니다. 수면 과학자들이 연구한 결과 잠잘 때. 눈을 양옆으로 굴리는 것은 수면 중 기억을 망각하는 효과를 준다고 합니다. 잊고 싶은 기억이 있을 때는 그 상황을 기억하며 눈을 양옆으로 굴려보세요. (웃음)
월간HRD/앞으로 도전해보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요?
문은식 소장/행복학을 더 완성해 문화 예술 공연과 접목을 시도하고 싶습니다. 윤도현, 김동렬, 버스커 버스커 등의 가수들이 공연하고, 저는 강의를 하며 함께 행복 콘서트 투어를 하고 싶습니다. 좋은 아빠 역할론에 대해 책을 쓰고 있기에 그 분야에 대해 강의도 해야겠죠.
월간HRD/저희 독자분들께 한 말씀 부탁합니다.
문은식 소장/인생은 축제입니다. 세상은 놀이동산이고요. 즐기십시오.
▲ 문은식 소장은 현재 포웨이 행복연구소 소장과 포웨이 엔터테인먼트 대표를 하고 있다.
원음방송 행복한 강의를 3년 하고, 원음방송 “거듭나게 하소서”를 진행하며,
현재 원음 방송청소년 상담 프로그램 생방송 “희망스케치”를 진행 중이다.
강의로 전주소년원 행복 명상을 4년 동안 지도했고,
KBS 라디오 초대석 강의 14회를 하였으며,
KBS1 TV 아침마당 목요특강에 출연했다.
저서로는 『나는 나와 연애한다』, 『엄마혁명』,『행복은 어떻게 오는가?』
등이 있으며, 가수 해피체어 싱글 1집을 발매하는 등 문화 활동 또한 활발히 하고 있다.
글+사진 김현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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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종] 7. 중흥의 리더십_중흥을 꿈꾼 제왕의 리더십
광해군 이후에도 조선 왕조의 부흥을 꾀한 군주와 대신은 많았다. 정조와 흥선대원군은 그들 가운데서도 특히 주목되는 존재들이었다. 그 두 사람은 영조(재위 1724~1776)의 자손으로서 각종 개혁을 통해 민생을 살리고 국력을 키우고자 노력했으며, 그 성과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서구 문명의 도전에 적절히 대응하기에는 힘이 닿지 않았다.
‘문체반정’으로 승부한 정조
정조(재위 1776~1800)는 ‘조선 후기의 르네상스 군주 정조’로 불린다. 그러나 나는 정조시대를 이해하는 새로운 코드로서 ‘문체반정(文體反正)’에 주목한다. 정조는 성리학을부흥시킴으로써 크고 작은 당면과제를 해결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일반의 지레짐작과는 달리 정조는 보수 개혁군주였다. ‘문체반정의 군주’였던 것이다.
정조는 왜 보수적인 왕이 되었을까. 알다시피 그가 왕위에 오르기까지의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왕이 된 다음에도 영조의 계비(繼妃) 정순왕후 일파의 저항이 심했다.
여러 대신들(벽파)도 늘 정조의 통치를 방해했다. 자연히 정조의 권력 기반은 불안정했다. 그래서 정조는 국시(國是) 성리학에 기대어 위기를 돌파하고자 하였다. 그
는 자신의 정통성을 성리학에서 찾았고, 그것을 통해 자신의 리더십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가. 진정한 통치자는 ‘군사(君師)’
정조는 탁월한 성리학자였다. 그는 왕이될 때까지 이미 많은 공부를 했지만, 왕이된 다음에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그는 문집인 『홍재전서(弘齋全書)』를 후세
에 남겼는데, 184권, 100책에 달하는 거질이었다. 왕으로서 문집을 남긴 이는 정조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정조는 ‘군사(君師)’ 즉, 백성의 임금인 동시에 스승이 되기를 꿈꾸었다. 과연 정조의 학문은 세종대왕과 견줄 정도로 대단했다. 그러나 정조는 정적들의 반대와 견
제를 의식해야 했기 때문에 학문적 관심범위가 상당히 제한되어 있었다. 그가 기성 이데올로기인 성리학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 이유가 거기 있었다.
재위기간 동안 정조는 탕평책을 실시했다. 그 자신이 당쟁의 피해자였기 때문에 정조는, 당쟁의 종식을 염원했다. 탕평책은 이미 영조가 썼던 것이지만, 정조의 탕평책은 약간 달랐다. 그는 그동안 탕평책에 호응하지 않았던 강경론자들(峻論)을 조정에 불러들였다(준론峻論 탕평책). 결과적으로, 정조의 조정에는 상당수 남인과 소론 학자들도 서게 되었다.
특히 남인은 재상 채제공(蔡濟恭, 1720~1799)을 비롯해 여러 소장학자가 왕의 총애를 받았다. 하지만 정조의 탕평책은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 그러자 정조는 비밀리에 어찰정치(御札政治)를 폈다. 가령 벽파의 우두머리 심환지(沈煥之, 1730~1802)에게 왕은 비밀 편지를 보내, “나는 네 편이다. 내일 조정에 와서 이런저런 주장을 해라. 그러면 내가 이것은 들어주고 저것은 거절할 것이다”라는 식이었다.
그의 어찰정치는 일반의 호평을 받는다. 비밀편지로 정조는 당파적 갈등을 극복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내 생각은 다르다. 정조의 어찰 정치는 도리어 군신 간의 정치적 신뢰를 해쳤다고 본다. 정조가 읽고 나서 곧 없애라고 주문했던 많은 비밀 편지들이 남아있다는 사실, 이것은 대신들의 불신을 증명하는 것이다.
‘군사’이기를 바랐던 정조라면 어찰정치를 하지는 말았어야 했다. 비밀편지로 그가 비밀거래를 일삼았다는 사실은, 정치적 반칙을 일삼았다는 뜻도 된다. 이것은 정조의 리더십을 망가뜨리는 것이다.
나. 규장각이라는 무기
정조의 정치적 리더십을 뒷받침하는 또 다른 수단은 규장각이었다. 세종의 집현전을 모방한 이 기관을 통해 정조는 자신의 통치를 도울 관료들을 양산했다. 그는 규장각을 일신해 초계문신제도(抄啓文臣制度)를 실시하기도 했다. 재기 있는 소장파 문신들을 뽑아 그들을 교육하고, 성과를 시험해 임용과 승진에 참고했던 것이다.
모두 열번에 걸쳐 정조는 100명의 초계문신을 발탁했다. 그들이야말로 왕조의 중흥을 위해 정조가 착수한 각종 사업을 주도했다.
규장각은 문물제도의 정비와 출판에도 앞장섰다. 『속오례의(續五禮儀)』, 『증보동국문헌비고(增補東國文獻備考)』, 『국조보감(國朝寶鑑)』 등 규장각이 간행한 출판물
은, 국가가 요구하는 통치 자료를 변화된 시대환경에 맞게 수정 증보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정조는 규장각 출신 인사들을 거느리고 ‘문체반정’을 추진하였다. 그들은 성리학만이 올바른 학문이라는 전제 아래, 그 밖의 새로운 학문과 기예를 사학(邪學), 즉
그른 학문이라고 낙인찍었다. 특히 문제가 되었던 것은 천주교였다.
다. ‘문체반정’의 한계
18세기 후반 한국사회는 새로운 도전에 직면했다. 명나라 말기와 청나라 초기 중국에서 유행하던 새로운 문예 사조가 물밀 듯이 한국으로 유입되었다. ‘소품(小品)’과 ‘패관문학’이 그것이었다. 새로운 문예사조는 경험주의 성향을 띠었고, 인간의 주관적 감정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형이상학적이고 보편주의를 표방한 성리학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풍조였다.
새로운 문예사조는 정조의 조정이 엄금하는 천주교나 조선왕조의 몰락을 촉구하는 『정감록』 사상과 결합하였다. 강이천을 비롯한 일부 지식인들은 새로운 종교, 정치 및 사회체제를 위해 문화투쟁을 전개했다. 정조와 규장각 인사들은 이를 용인하지 않았다. 그들은 ‘문체반정’을 내세우며 낡은 성리학적 규범과 가치를 회복하고자 노력하였다. 정조의 시대는 한국사의 중요한 분수령이었다. 우리가 원했든 원치 않았든지 그때 한국사회는, 서구중심의 세계질서 안으로 편입되고 있었다. 하지만 정조는 서양의 종교와 문물은 고사하고, 중국으로부터 들어오는 새로운 자극마저 도외시하였다.
라. 문예 부흥의 실상
정조의 통치기간에 상당한 문화발전이 일어난 것도 사실이다. ‘조선중화의식(朝鮮中華意識)’이 고취되어 국가적 자긍심이 높아졌다. 진경산수(眞景山水)로 불리는 ‘국화풍(國畫風)’도 등장했다. 왕은 남인 실학파와 노론 북학파 등도 격려하였고, 소외된 중인(中人)들의 위항(委巷) 문학에도 관심을 뒀다.
백성을 괴롭혀 온 형정(刑政)도 크게 개혁되었다. 서자들의 지위를 높이려는 조치도 있었고, 원성이 자자했던 노비추쇄법(奴婢推刷法)도 폐지되었다. ‘통공정책(通共政策)’이 추진되어, 소상인들의 이익도 어느 정도 보장되었다. 잊힌 역사적 인물들도 재발굴되었다. 정조는 이순신을 비롯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의 충신, 효자, 열녀들을 추가로 포상했다. 사화와 당쟁의 와중에 놓친 선비들의 업적을 재평가하기도 했다.
그러나 정조의 노력은 한 가지 목표로 귀착되었다. 성리학 중심의 구체제를 더욱 강화하는 일이었다. 구질서를 재확립함으로써 정조는 새로운 변화를 요구하는 시대적 요구를 차단하고자 하였다.
결론적으로 말해, 정조는 탁월한 자질을 갖춘 왕이었으나 시대적 한계를 넘지 못했다. 그가 다스리던 조선왕조는 서구중심의 세계질서에 편입되기 시작했지만, 왕은 그점을 외면하였다. 그리하여 정조는 눈앞에 다가온 새로운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격랑 속에 침몰한 흥선대원군의 리더십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1820~1898)은 독특한 인물이었다. 어린 나이로 즉위한 고종(재위 1863~1907)의 생부로서 그는 10년 동안 국정을 좌우했다. 실권을 쥔 역사상의 유일한 대원군이었다. 그는 세도정치를 종식하게 하는 등 많은 업적을 쌓았다. 그러나 후세는 그를 쇄국정치의 장본인이라 비판하고, 19세기 말 근대화(개화)에 실패한 근본적인 이유가 그의 잘못에있다고 혹평했다.
가. 왕보다 강했던 대원군
흥선대원군은 웬만한 왕들보다 더 강력했다. 조선 후기 여러 왕이 한 번도 실행에 옮기지 못한 굵직한 사업들을 그는 대부분 달성했다. ‘조선 왕조의 마지막 개혁자’라는 평가를 받을 만했다. 그의 업적은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대원군은 단시일 내에 세도 정치를 마감했고, 조선의 정궁인 경복궁을 재건했다. 그는 왕실의 권위를 회복했던 것이다. 둘째, 대원군은 민생을 구제했다. 전국의 서원 2만여 개 중에서 48개의 주요 서원만 남겨 놓고, 그는 나머지를 몽땅 철폐했다. ‘호포제(戶布制)’를 재정해 양반도 일반 평민과 마찬가지로 세금을 물게 했다. 셋째, 그는 외세의 침략에 맞서 싸웠다. 미국과 프랑스의 침략도 성공적으로 방어했던 것이다. 대원군의 정치력은 과연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만했다.
나. 조직 관리의 귀재, 거침없이 개혁하다
대원군은 조직과 관리에 뛰어났다. 집권하기가 무섭게 그는 경상도, 충청도, 전라도에 거주하는 부호들과의 협력관계를 강화했다. 그들은 대원군을 재정적으로 후원했고, 대가로 벼슬을 얻었다. 고무된 대원군은 평소 마음먹은 굵직한 개혁들을 실행에 옮겼다. 중간에 실수도 없지 않았지만, 그의 과감한 결단에 힘입어 조정의 기능이 빠른 속도로회복되었다.
대원군이 국정을 담당한 지 불과 수년 만에 나라 살림이 달라졌다. 비었던 국고가 다시 찼다. 탁월한 조직 관리의 결과였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외침을 겪은 뒤 좀체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던 나라 살림이 되살아난 것이다.
다. 대원군의 비운
그에게도 곤혹스런 문제가 있었다. 그의 집권 당시(1864) 중국은 내우외란에 극도로 시달렸다. 아편전쟁(1840~1842, 1856~1860)으로 홍콩을 영국에 할양해야 했고, ‘태평천국의 난’으로 말미암아 혼란의 도가니에 빠졌다. 설상가상으로 북쪽에서는 러시아가 지속해서 남하정책을 강행하였다. 동아시아의 국제정세는 한 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운 형편이었다.
그런 한국사회에 천주교가 성행했다. 천주교도는 유럽의 강국 프랑스를 배경으로 삼았다. 정조 때부터 가시화되기 시작한 서구의 침략위협이 이때 이르러 엄연한 현실이 되고 말았다. 대원군은 그 점을 놓치지 않았다.
그러나 사태를 해결할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조선왕조는 일본처럼 서구화를 추진할 물적 바탕도 없었고, 중국처럼 서양 세력으로부터 곤욕만 당하는 것도 차마 못 할 일이었다. 그 시점에서는 ‘개화’를 선택했다 하더라도, 결과를 낙관하기 어려웠다. 결국, 대원군은 나라의 문을 꼭 잠그기로 했다. ‘내수외양(內修外攘)’ 즉, 국내정치에 힘써 지치(至治)를 이루고, 밖으로는 외적을 물리쳐 평화를 유지한다는 고전적인 정책이 그의 선택이었다. ‘척화비’에 아로새겨진 대원군의 쇄국정책은 이것이었다.
라. 쇄국정책의 평가, 어려운 과제
대원군의 개혁정치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들도 그의 완고한 쇄국정책에 대하여는 고개를 젓는다. 그때 대원군이 나라를 개방했더라면 일제에 의한 굴욕적인 패망은 없었을 것이라는 한탄이 쏟아진다.
그러나 그게 과연 그렇게 간단한 일이었을까. 차라리 대원군의 쇄국정치는 정조의 ‘문체반정’보다 오히려 합리적인 선택이 아니었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할 때도
잦다. 설명을 조금 보태보자. 정조의 쇄국은 그의 자발적 선택이었다. 그때는 서양이 무력으로 동아시아를 유린하기 전이었다. 따라서 그때 ‘개국’과 ‘통상’을 선택했
더라면 서구와의 유대를 평화적으로 도모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대원군의 시대는달랐다. 준비도 없이 무턱대고 나라를 개방했다가는 침략대상으로 전락하기에 십
상이었다.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인도, 아프리카의 여러 나라와 남아메리카 대륙은 일찌감치 개방을 강요당했지만, 저들의 식민지가 되고 말았다. 그런데도 우리는 공허한 주장만 되풀이한다. 대원군이 쇄국 정책을 펴지 않았더라면, 우리도 일본처럼 근대화에 성공했을 것이라고 말하기는 쉽다. 하지만 그건 억측일 뿐이다. 개화는 옳고 쇄국은 나쁘다는 이분법을 지양하자. 21세기 한국사회도 과연 어떻게, 얼마나 개방해야 할지 속도 조절하기가 쉽지 않다. 중요한것은 언제나 외세에 휘둘리지 말고, 주체적으로 결정한다는 원칙이다.
글 백승종 마을공동체문화연구소 대표(전 서강대학교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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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철] 1. Insight & Strategic Thinking
Business Basic Skill은 크게 Critical Thinking, Solving Skill, Communication 세 가지로 구분된다. 이는 또 세부 항목으로 나뉘는데 Critical Thinking은 통찰&전략적 사고와 Logical Thinking으로, Solving Skill은 문제 해결과 문제 작성으로, Communication은 일대일 관점의 보고, 다대다 관점의 토론, 일대다 관점의 PT로 구성된다. 이번 호에서는 통찰과 전략에 관한 비즈니스 스킬을 다양한 사례와 함께 알아본다.
패러다임 변화를 읽어야 통찰력이 생긴다.
애플의 아이폰은 모바일폰의 경쟁을 기술 우위에서 UI(User Interface, 사용자가 제품을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는 환경)로 바꾸었다. 그동안 노키아, 삼성전자, LG전자 등 휴대폰 제조회사는 기술 우위를 확보하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하였다. 그것이 통신기기 메이커의 패러다임이었다. 그런데 애플은 기술 우위보다는 사용자의 감성과 편의성을 극대화하였다. 고객은 애플의 손을 들어주었고 휴대폰의 패러다임이 급격히 바뀌기 시작했다.
필자는 LG전자 디자인그룹에서 교육할 기회가 있었다. 제품을 디자인하는 그룹이므로 당연히 미적 감각이 뛰어난 미대 출신이 대부분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심리학, 인문학 전공출신이 많았다. 그들이 하는 일은 유저인터페이스 설계였다. 시장을 주도하고 있는 애플의 패러다임을 LG전자도 따르고 있었다.
패러다임의 변화를 알 수 있는 재미있는 실험이 있다. 공장의 굴뚝에서 시커먼 연기가 나오는 사진이 있다. 이 사진을 사용하여 포스터를 만든다면 적절한 주제는 무엇일까?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환경 보호, 공기 오염, 지구를 살립시다 등 자연과 관련된 주제들을 떠올릴 것이다. 이 사진에 부정적인 이미지가 있는 것이다.
만일 6~70년대에 같은 질문을 던진다면 어떨까? 아마도 이런 대답들이 나올 것이다. 잘 살아보세, 경제 발전, 우리도 할 수 있다 등. 경제 성장이나 자립과 관련한 주제들이다. 사진의 이미지가 긍정적인 것이다.
자! 사진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 동일한 사진을 가지고 시대적으로 인식의 차이가 생기는 것은 왜일까? 그 사회나 그 시대를 지배하는 가치관이 다르기 때문이다. 하나의 사진이 한 시대에는 경제 성장을 강조하는 포스터에 사용될 수 있고, 또 다른 시대에는 환경 보호에 사용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패러다임의 변화(Paradigm Shift)이다.
전략적 사고를 정확히 이해하라
SBS 드라마 <시티헌터>에 다음과 같은 장면이 나온다.
남자 주인공인 이윤성은 대통령의 딸을 임시로 가르치는 가정교사 역할을 수행한다. 이때 대통령이 한 가지 고민을 이야기한다.
대통령 : “딸애가 수학과 영어가 딸려. 시간은 없는데 어떻게 해야 할까? 대학은 가야 하는데….”
이윤성 : “수학과 영어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그리고 한 과목에 시간을 집중해야 대학에 갈 수 있습니다.”
이 대화에서 두 사람의 목적은 딸 아이가 대학에 가는 것이다. 그리고 가정교사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하여 집중하라고 조언한다. 이것이 ‘전략’이다.
전략은 선택과 집중 즉, Choice & Focus다. 그럼 왜 선택과 집중을 할까? 전략이란 단어는 군사 용어이다. 전쟁은 항상 적이 존재하고 적이 없는 전쟁은 있을 수 없다. 선택과 집중의 목적은 적을 이기기 위함이다.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인 것이다.
3C(고객, 경쟁사, 자사)를 알아야 한다
음식점을 오픈하는 3가지 케이스를 보자.
첫 번째, 우리나라에서 유동인구가 가장 많은 곳이 어디일까? 강남역 주변이나 명동이다. 유동인구가 많으니 먹거리 사업을 하면 성공하리라 생각한다. 그런데 반드시 성공할까? 장사가 안 되는 곳도 있다. 사람이 많다고 모두 내 고객은 아니다. 내 고객이 누구인지 잘 알아야 한다.
두 번째, 어느 날 친구를 만나기 위해 외출했다가 식사 시간이 되어 음식점을 찾는데 주위에 먹을만한 곳이 없다. ‘이 곳에 음식점을 차리면 장사 좀 되겠는데’라고 생각한다. 이 사람은 성공할까? 아니다. 그 곳은 경쟁자가 없다. 다시 말해 시장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곳이다.
세 번째, 음식 솜씨가 좋은 주부가 있다. 주변 사람들이 음식을 맛보고 음식 장사를 하면 무조건 성공하겠다고 하자 음식점을 열었다. 과연 성공할까? 물론 성공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실패할 가능성이 더 높다. 왜 그럴까? 이 주부는 가족을 위해 좋은 식재료를 사용하여 오랜 시간에 걸쳐 정성과 시간을 들여 건강하고 맛있는 음식을 만든다. 그런데 음식점은 원가도 생각해야 하고 신속하게 음식을 차려 내야 한다. 시장이 필요로 하는 역량과 주부의 역량이 일치하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시장이 크다고 성공이 보장되지는 않으며 경쟁자가 없다고 항상 좋은 것은 아니다. 또 본인의 능력이 시장에 통하느냐 하는 것도 중요한 요인이 된다. 첫째는 고객 관점, 둘째는 경쟁사 관점, 셋째는 자사 관점이다. 이 세 가지 관점에서 골고루 확인하여 판단해야 성공할 확률이 높아진다.
일은 ‘내 고객이 누구인가’로부터 출발한다.
자동차 딜러들의 경쟁과 성공을 그린 KBS 드라마 <열혈장사꾼>의 일부다.
경찰청에서 경찰차 공개 구입 입찰을 실시한다. 주인공 하류는 하루 종일 차에서 생활하는 일선 경찰을 이번 프로젝트의 고객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경찰들의 의견을 반영하여 ‘세미5’라는 차를 선택한다. 그리고 입찰 프레젠테이션에서 6백 여 명의 일선 경찰들의 의견을 반영했다고 강조한다.
이에 반해 경쟁사는 고객을 시민으로 보았다. 시민은 경찰이 가까이 있을 때 안심하게 된다. 작은 차가 골목골목을 누빈다면 시민은 범죄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진다. 외국의 사례에서도 고성능 경찰차 보다 작은 차가 시민과 가까이 있을 때 오히려 범죄 발생률이 줄어들었다. 따라서 1,000cc 경차인 ‘크림’을 제시한다.
입찰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 주인공이 제시한 중형차가 떨어지고 경쟁사가 제시한 경차 ‘크림’이 선정되었다.
왜 그런 결과가 나왔을까? 주인공은 고객을 경찰로 보았고, 경쟁사는 고객을 시민으로 보았다. 고객을 누구로 보느냐에 따라 다른 결과가 나왔다. 업무의 출발점은 내 고객이 누구인가 하는 것을 명확히 하는 것에 있다.
글 이호철 비즈센 대표 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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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재승] 역전왕 차대리, 나는 강사다!
“방황하던 대학 시절 무작정 떠난 호주에서 짧은 영어실력 때문에 뜻하지 않게 새우잡이 배를 타게됐습니다. 한번 배를 타면 한 달간 말도 통하지 않는 외국인과 지내며 스테이크와 새우만 먹으며 버텨야 했지요. 새우가시에 찔린 양손은 피투성이가 되기도 했고 선내 작업대에 깔려 목숨을 잃을 뻔한 적도 있습니다.” 이어지는 사연은 짐작 가는 대로다. 그는 ‘주어진 상황에 불평만 하지 말고 한번 부딪혀보자’고 굳은 결심을 한다. 그때부터 크레인 작업, 엔진수리, 항해법까지 닥치는 대로 배웠고, 9개월 후 주변 선주들로부터 스카우트 제의를 받을 정도로 인정받게 되었다. 이 드라마틱한 인생의 주인공, 차재승 제일모직 대리를 만났다.
독특한 이력의 사내강사를 물색하던 기자의 레이더망에 차재승 대리가 들어온 것은 9월 초. 차 대리는 8월말 삼성이 ‘열정樂서’ 시즌 3에서 새롭게 선보인 직원강연의 첫 번째 주자로 강단에 올라 새우잡이 과거를 고백한 후 언론에 이름 석 자를 올리고 있었다.
그러나 사실 그가 강단에 선 것은 처음이 아니다. 품질공정관리 업무를 하고 있는 그는 이미 4년째 사내에서 직무 교육 강사로 활발히 활동해 오고 있다. 인터뷰가 있던 날도 교육이 한창이었다.
청주의 한 대학 캠퍼스에서 강의 중간에 짬을 낸 그와 마주 앉았다. 실험설계 해석능력향상 교육을 진행 중이라고 했다. 그는 그 외에도 통계적 품질관리(SPC), 품질관리(TKD), 기초통계, 데이터분석 등의 과목을 맡고 있어 두 달에 한 번꼴로 강의를 한다.
“입사 후에 통계적 품질관리 교육을 받았어요. 외부 강사의 진행으로 사흘 동안 진행됐는데, 갭이 있더라고요. 이론적 지식은 출중한데 내부 상황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니까 어떻게 접목하고 응용해야 할지에 대해서는 전달이 되지 않는 거죠. 우리 회사 데이터를 수업에 활용하면 더 쉽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이듬해에 강사님께 사흘 중 하루만 달라고 양해를 구했어요. 이틀간 배운 내용을 정리하고 우리 회사 데이터를 응용해줬는데 반응이 좋았죠. 그 후로는 외부강사를 초빙하지 않았어요. 제가 맡게되었거든요.”흥미로운 것은 제일모직에 사내강사 제도가 생긴 것이 그 이후라는 점이다.
사내강사 교육도 그룹장 추천을 통해 제도적으로 선발된 후에야 들었다. 일단 가르치고 나서 가르치는 방법을 배운 셈이다. 새우잡이 과거가 떠올랐다. 이쯤 되니, 그에게 적극성을 넘어 저돌적 긍정성이 느껴졌다.
“아니에요. 얼마나 소심하고 내성적인 사람인데요. 사람도 잘 못 쳐다봤어요. 근데회사가 저를 바꿨어요(웃음). 정확히 말하면 예전에 계셨던 전무님 두 분이 변화의
계기를 주셨어요. 정말 힘들게 하셨거든요. 임원단 참석 하에 일주일에 두세 번씩 프레젠테이션을 해야 했어요. 처음에는버벅댔죠. 욕도 많이 먹었고요. 근데 죽을 만큼 힘들었던 게 어느순간 편해지는 거예요. 하다 보니까 순발력 있게 대처도 하게 되고. 그러면서 생각했죠. 강의를 한 번 해봐야겠다”!
그렇게 시작한 강의는 그에게 새로운 삶을 선물했다. 가르치기위해 더 많이 배우려 들게 됐다. 책을 파고, 교육에 여러 번 다시 들어가고 혼자 공부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총동원했다. 그러고도 남은 갈증을 풀기 위해 고려대 행정대학원에 진학해 품질을 전공하고 있다.
“한 번 강의하려면 자료 정리해서 교안도 만들고, 응용 학습에 활용할 회사 내 데이터도 뽑아야 하고 할 일이 정말 많아요. 준비하는 과정이 너무 힘들죠. 근데 한 번 준비한 것은 절대 안 잊어버려요. 또 교육생들이 물어보면 대답을 해줘야 하니까 완벽하려고 노력하잖아요. 가르치면서 훨씬 많이 배우죠.”
그의 꿈은 기여하는 삶이다. 방식이 어떠하든 가르치고 전달하며 살고 싶단다. ‘열정樂서’ 이후 사내외에서 물밀 듯 들어오는 강연요청에 흔쾌히 나서는 이유다.
“지금은 조직에 소속되어 있는 직장인인 만큼, 회사에 기여하고 싶은 마음이 커요. 회사에 도움이 되고 회사의 실적을 올리는 일을 충분히 하고 싶어요. 지식과 전문성을 쌓아 신입 직원들에게 많이 전달해 주고 싶고요. 최근에는 생산직 사원들을 위한 현장세미나를 기획하고 있어요. 한 달에 한 번 제품이나 공정에 관한 교육을 교대 조별로 한두 시간씩 하는 방식이에요. 교육 과정도 점차 세분화하고 늘려가려고 합니다.”
불평·불만 많은 투덜이에서 자신감 넘치는 청년으로, 버벅대는 프리젠터에서 사내외를 넘나드는 명강사로 역전하며 서른네 해 인생을 옹골차게 살고 있는 차재승 대리. 앞으로 그려갈 역전 인생을 기대해 본다.
▲ 청주의 한 대학 캠퍼스에서 차재승 대리가 강의를 하고 있다. 사외 교육장은
참석율이 저조하나 집중도를 높일 수 있고 사내 교육장은 참석율이 높으나 업무
등의 방해 요소가 있다. 차 대리는 “교육장소로 사내외를 적절히 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차재승 대리가 강의를 위해 직접 만든 교안. 책,정보, 타 교육 자료들을 활용해 작성하고 편집한다.
특히 회사 보고서들은 사례 혹은 예시로 쓰기에 좋은 소스다.
▲ 삼성그룹은 지난 6월 열정樂서 무대에 설 직원들을 뽑기 위해
20만 명의 임직원을 대상으로 ‘나는 강사다’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1차 에세이, 2차 5분 강연 오디션 검증을 거쳐 차재승대리를 포함한
열 명이최종 선발됐다.
사
진출처 : 열정樂서 공식
홈페이지
글+사진 김민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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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민주] HRD는 경영진과 실무진 욕구 사이의 접점을 찾는 일
들어서 알고 있는 지식과 그것을 체화한 지혜 사이에는 엄청난 간격이 있다. 심민주 팀장은 HRD를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익힌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전공자였고 타의로 HRDer의 삶에 발을 들여놓았던 그녀가 서른셋 나이에 인재개발팀 수장이 될 수 있었던 열정의 이야기들.
“교육으로 사람을 바꿀 수 있나요?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인터뷰를 위해 명함을 주고받은 직후, 심팀장이 대뜸 말했다. 대개의 HRDer와는 확연히 다른 생각, 그러나 확신에 찬 눈빛.
“제가 생각하는 HRD는 좋은 회사를 만들고 싶은 경영진의 욕구와 좋은 회사에 다니고 싶은 실무진의 욕구 사이에 접점을 만들어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
서 돌이켜보건대 저는 교육 전문가이기보다는 기업의 조직 문화 전문가가 되려고 노력했던 것 같아요.”
슬며시 그녀에 대한 호기심이 발동했다.
HRD관(觀)의 정립
사실 심 팀장은 HRD 전공자가 아니다. 한국외국어대학교 중국어학과를 졸업했고, 이후 삼성그룹에 입사했다. 지망 회사로 당시 인기가 높았던 제일기획과 유통 분
야 계열사를 차례로 써넣었다. 그런데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삼성인력개발원으로 발령이 났다.
“당황스러웠지만 HRD 업무가 전화 응대, 강의장 세팅부터잖아요. 열심히 했죠. 근데 1년쯤 지나니까 교육을 전공한 동기들한테 밀리는 거예요. 주임 승진이 한 해
늦었거든요. 그때 고민을 했죠. 내가 이 일을 계속할 것인가. HRD는 반드시 전문성이 있어야 하는 분야인데… 지기는 싫었어요.”
짧게는 한 달, 길게는 1년에 이르는 교육에도 들어가고 책도 부지런히 읽었다. 시간이 쌓이면서 HRD관이 조금씩 잡혀갔다. 시스템, 제도, 논리 모두 중요하지만 기업 교육의 궁극적 목적은 좋은 회사 만들고 싶은 오너와 좋은 직장 다니고 싶은 직원의 욕구를 채워주는 것이라는 생각에 힘이 실렸다.
입사 2년 만에 팀장 승진
뚜렷한 관(觀)은 커리어 패스의 나침반도 됐다. 7년간 일한 첫 직장을 퇴사하고 아모제를 선택할 때, 경영진이 그녀의 HRD관을 공감해 준 영향이 컸다. 그래서 6년
이 지난 지금까지도 아모제에서 일하는게 재밌다고 했다. 실제로 회사 이야기를 하는 그녀의 먹빛 눈동자에 자주 별이 반짝였다.
“저희 아모제는 본사에 50여 명, 전국 직영점에 상시 근로자 1,500여 명이 근무하고 있어요. 그러다 보니 교육이 흩어져 있었어요. 아모제의 미션, 비전, 핵심가치
를 어떻게 전파하고 공유할 수 있을까 고민했죠. 그래서 현장 사내강사 육성을 통한 OJT와 함께 이러닝을 도입했어요(그녀는 삼성인력개발원 크레듀의 창립멤버
였다). 독서통신, 중간관리자 이러닝 등을 했고 특히 현장 OJT를 이러닝과 결합해서 하는 일들에 주력했어요.”
직접 스토리보드를 짠 영상으로 이러닝사전 교육을 한 후 현장에서 OJT를 하는 방식이었고, 반응이 좋았다. 2006년 10월 대리직급의 경력 사원으로 입사한 지 2년 채 되지 않은 2008년 7월 인재개발팀 팀장이 됐다 .
‘우리가 남이가’ 끈끈한 조직 문화
아모제는 매주 화요일마다 신입사원 교육인 AFM 교육을 한다. 사람이 있으나 없으나 연중무휴다. 하루를 일하더라도 수료를 해야만 급여가 나온다. 교육 대상은 아르바이트생부터 경력 직원까지 ‘아모젠(아모제 직원을 일컫는 말) 누구나’다.
교육 대상뿐만 아니라 아모제는 채용과 승진에도 범위를 열어둔다. 매장 스태프, 서비스매니저로 시작해 임원의 자리에 오른 이들이 여럿 있다.
“하고자 하는 열정만 있으면 기회를 주고, 성공할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는 회사예요. 그러다 보니 성장 욕심이 있는 직원들이 많고 근속연수도 높아요. 본사 직원의 과반수가 10년 차 이상이거든요(아모제는 올해로 창립 17주년을 맞았다). 직장이지만 가정,친구, 생활의 터전이자 미래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은 것 같아요. 한 사람 한 사람의 열정이 지금의 아모제를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외식업계 HRDer, 말을 아껴라!
심 팀장은 팀원들에게 ‘현장 직원들의 이야기를 가능한 한 많이 들어주라’고 요청한다. 최전방에서 고객의 불만을 가장 많이 듣는 이들이지만 정작 그들의 고충을 들어줄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HRD가 직원들의 욕구를 채워주는 일이라는 지론과 일맥 하는 부분이다.
뿐만 아니라 현장 직원들의 자율성을 높여주는 분위기 조성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매뉴얼과 시스템은 필수지만, 그것만으로 완벽할 수 없어요. 과거와 달리 지금은 매뉴얼만 따르다가는 고객의 불만을 듣기 십상이죠. 외식업계 교육의 50%는 직원들이 현장에서 스스로 러닝할 수 있도록 분위기 조성을 해줘야 합니다. 잘하는 현장 직원들을 발굴해 아모제 스타상을 수여하는데 이런 포상 이벤트도 좋은 방법이 될 수 있어요. 말은 아끼는 거죠.”
말을 아끼되, 조직 대다수를 차지하는 현장 직원들이 진정 느끼고 원하는 것을 알기 위해 그녀는 위생사와 조리사 자격증을 따기도 했다. HRDer로서 교육을 제공하고 지침을 내리기보다는 직원 개개인의 욕구 만족에 길라잡이가 되고 싶다는 그녀의 진심과 열정이 느껴졌다.
섭외 전화를 건 순간부터 한 차례 이동하며 진행된 인터뷰가 끝날 때까지, 그녀에게는 강도 높은 에너지가 흘렀지만 에너지 보존의 법칙이 깨질 줄 몰랐다.
“사실 내일 아침 눈을 떴을 때 하고 싶은 게 없을까봐 가장 겁나요. 열정이 사그라질까 봐요. 제가 열정을 잃으면 팀원들의 에너지도 낮아질 테고, 직원들의 사기도 저하되겠죠. 끊임없이 에너지를 뿜으면서 가고 싶어요. 멋있게! ”
글+사진 김민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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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상진] 직원이 행복해야 회사가 행복합니다
신상진 상무는 취업준비생들 사이에서 ‘우리 신 상무님’으로 통한다. 몇 해 전부터 구직자들에게 쓰기 시작한 편지 때문에 붙은 별명이다. ‘자사에 지원해 주어 감사하다’ 식의 인사치레가 아니다. 직업 선택 십계명을 적는가 하면 ‘연봉을 손보았다(신 상무의 표현 그대로 빌려 왔다)’는 여담까지 그의 편지는 스스럼없다. 구직자의 애타는 마음을 위로하고픈 인사 임원의 진심이리라. 실제로 온라인 취업 사이트에서는 신 상무를 언급하며 STX는 따뜻한 회사라는 말들이 오가고 있다.
신상진 상무는 STX그룹의 인재개발실장 상무로 재직하다 올해 STX조선해양으로 자리를 옮겼다. 터를 옮겼을 뿐, 그는 사회에 첫발을 들여놓았던 지난 1986년부터 지금까지 HRDer로서의 삶을 걸어왔다. 26년이란 세월을 쌓아올리며 나름의 철학이 정립되었을 것 같아 으레 하듯 철학을 물었다. 그러자 “철학이 뭐예요?” 하고, 반문이 돌아온다. 그러고는 질문 열댓 개가 이어진다. “상무님, 이제 제가 질문을 좀 드려도 될까요?”
멋쩍게 웃으며 그는 ‘직업병’이라고 말했다. 수십 년간 사람을 채용하고 교육하다 보니 생긴 병이라고. 인터뷰 직전에도 신 상무는 경력 사원 면접을 한 차례 보고 온 터였다. 그러나 한 시간 넘게 진행된 인터뷰 후에 기자가 느낀 바를 첨언하자면 단순한 직업병은 아니었다. 그는 사람을 좋아하고, 사람에 관한 호기심이 많은, 진정한 HRDer였다.
HRD는 서비스업, 고객 만족 높여야
신 상무는 쌍용그룹 계열사인 종합상사에서 첫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그때 맡은 업무가 인사·교육이었고, 그것이 HRDer로서의 출발이었다. 일을 하다 보니 적성에 맞았고 보람도 있었다. 원대한 꿈보다는 소박한 하루하루를 보내면서 자연스레 HRDer의 삶에 녹아들었다는 표현이 더 어울린다.
“구성원들이 행복해야 좋은 회사가 될 수 있잖아요. 그렇다고 과도하게 행복하면 회사가 망가질 수 있고. 적당한 행복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HRDer의 역할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또 HRD는 효과가 장기간에 걸쳐 나타나는데, 이게 또 재밌어요. 측정해보면 보람도 있고. (웃음)”
그래서 그는 HRD를 ‘서비스 업무’라고 말한다. 고객들이 만족할때 비로소 제 역할을 해낸 것이라고 본다. 고객은 구성원일 수도 있고 경영진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요즘 그의 VIP 고객은 누구일까?
“젊은 친구들이죠. 세대가 바뀌면 HRD도 바뀌어야 합니다. 옛날방식대로 하면 안 따라와요. 그래서 동호회도 만들어주고, 주니어 보드 같은 것을 활용해서 일을 재미있게 해주려고 합니다. 일하는 게 놀이처럼 되면 제일 좋겠죠. 기성세대랑 더불어서 성과도 내고요. 늘 고민하는 부분입니다.”
억 소리 나는 신입사원 교육, 첫 단추를 잘 꿰어야
STX는 지난 2007년부터 신입사원을 대상으로 크루즈 연수를 시행하고 있다. 국내 최초 도입으로 세간의 화제가 되었던 이 연수는 조선해운 전문 기업의 이미지를 신입사원들에게 전달할 수 있는 독창적인 방법으로 자리 잡았다.
약 일주일간 중국의 대표 도시를 방문하고 현지에서 사업을 펼치고 있는 그룹의 해외사업장을 탐방하는 연수에 소요되는 비용은 약 30억 원. 5백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배 한 척을 빌리는 데만 하루에 1억 원이 든다. 한 해 총 교육 예산이 2백억 원인 것을 고려하면 상당한 투자다.
“첫 단추를 잘 꿰어야 합니다. 연수 중에 이탈하는 직원들도 종종 있어요. 연수 끝나고 그만두는 경우도 있고요. 아까워하면 안돼요. 빡빡하지만 회사의 문화를 흠뻑 익힐 수 있도록 처음부터 교육합니다.”
‘첫 단추를 잘 꿰는’ 노력은 채용 과정에도 나타난다. 가장 눈여겨 보는 것이 ‘직무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가’이다. 기간산업에 대한 애정과 철저한 준비로 무장된 지원자를 가려내기 위해 타 회사 어느 곳에 지원했는지를 꼭 물어본다. 기간산업에 지원하면서 서비스 업종의 타 회사에 지원했다는 지원자들을 간혹 만난다.
이들에게는 불합격 처사로 그치지 않고 성찰 질문을 꼭 챙긴다. “네가 진짜 원하는 게 뭐냐?”
2만 번 남은 저녁 식사 시간, 누구와 함께 보낼 것인가?
신 상무는 한 시간 남짓 이어진 인터뷰에서 기자에게 자주 질문을 던졌다. 그 중 무심하게 던졌지만, 뇌리에 깊이 박힌 문장이 있다.
“앞으로 저녁을 몇 번 먹을 것 같아요? (기자의 나이를 묻더니 잠시 계산한다) 80세까지 산다고 하면 앞으로 2만 번 정도 남았어요. 이 시간을 누구와 함께 보낼 거예요? ”
그가 만나는 사람 한 명 한 명에게 어떤 애정을 가졌는지 짐작이 갔다. 탈락자를 직접 만나 떨어진 이유를 함께 고민하고 코칭을 해주는가 하면(고마움의 뜻으로 인사팀에 초코파이와 음료수를 50개씩 보내오기도 했다) 페이스북을 통해 직원, 심지어 직원의 어머니와 메시지를 주고받기도 했다.
그에게는 삶 전반이 HRD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향을 준 인물이 궁금했다. “두 분이 계십니다. 인생을 재밌게 살라고 일러주신 첫 직장의 팀장님, 지금은 은퇴하셨지요. 그리고 입사 당시 부장님이셨던 강덕수 회장님입니다. 앞서 가는 직장 생활의 롤모델이되어주셨죠.” 두 멘토는 긴 세월동안 이따금씩 찾아오는 매너리즘의 탈출구가 되어줬다고도 했다.
그는 HRD를 ‘구성원들이 잠재 역량을 표출할 수 있도록 자극을 주는 것’이라 정리했다. 그리고 현업 리더들과 긴밀한 협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팀장을 코치로 세우고, 멘토링 제도를 적극활용하는 방안을 예로 들었다.
“타인의 잠재 역량을 끄집어낼 수는 없습니다. 교육, 이벤트 등을 통해서 잠재 역량을 표출할 수 있도록 자극을 줄 뿐이죠. HRD 부서만 잘한다고 능사가 아닌 시대입니다. 현업에 있는 리더들과 함께 고민하고 긴밀하게 협업해야 합니다
글 김민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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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식] 'ATTRACTIVE KOREA'를 만들기 위하여
박영식 가톨릭대학(이하 가톨릭대) 총장은 다툼과 분열 대신 소통과 화합을 주도하여 서로 믿고 평화롭게 살 수 있는 사회를 건설할 인재를 키우는 대학, 영혼과 철학을 지닌 대학으로 성장하기 위한 준비로 여념이 없다.
가톨릭대학교는 산학협력 선도대학 선정(2012), 대학교육역량강화사업 5년 연속 선정(2012), 학부교육선진화선도대학 3년 연속 선정(2012)되는 등 주요 국책사업에 연속 선정되어 영혼과 철학을 지닌 인재 교육의 성과를 입증했다. 다음은 박 총장의 교육 철학과 그 실행방침에 관한 일문일답이다.
월간HRD / 학교의 인재상에 적합한 인재를 길러 내기 위한 특징적인 교육 시스템과 제도에는 어떤 것이 있습니까?
박영식 총장 / 가톨릭대는 인성, 지성, 영성을 고루 갖춘 윤리적 인재 양성을 위해 ‘윤리적 리더 양성 프로그램’, 다시 말해 ELP(Ethical Leaders Rearing Program)를 자체 개발하여 실시하고 있습니다. 1~2학년 재학생을 대상으로 신청을 받아 졸업 때까지 교과 영역과 비교과 영역의 인성, 문제해결능력 분야에서 일정 점수를 취득하면 각종 혜택을 제공하는 프로그램입니다.
ELP 프로그램의 성공에 힘입어 지난 1학기에는 통합 교양교육기관인 ‘ELP(Ethical Leaders Path) 학부대학’을 출범시켜 인성교육과 교양교육 효과를 극대화하고 있습니다. ELP 학부대학은 산하에 창의교육센터, 인성교육센터, 베나생(베풂·나눔·생명)센터를 두고 그동안 가톨릭대가 꾸준히 실시해온 인성, 영성, 창의력, 봉사 관련 교과목과 프로그램을 통일성 있게 관리하며 발전시키고 있습니다.
월간HRD / 재학생의 사회 진출을 위해 학교는 어떤 노력을 하고 있습니까?
박영식 총장 / 가톨릭대는 올해 초 치열한 경합을 뚫고 산학협력선도대학(LINC) 지원사업에 선정되었습니다. 대학과 기업이 공동으로 지역 산업의 수요에 부응하는 인력을 양성하고 공생발전 하도록 돕기 위해 교육과학기술부가 실시하는 대규모 국책사업인 LINC 사업의 시행은 학생들의 사회 진출에도 크게 도움이 될 전망입니다. 이 사업의 일환으로 학생들의 취업·창업 지원을 위한 창업교육센터와 현장실습지원센터가 설치되어 운영 중입니다. 또한, 교내 창업동아리를 선발해 이들의 활동을 지원하고 있으며, 창업 경진대회와 캡스톤 디자인 경진대회도 실시합니다. 이 사업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면 가톨릭대의 취업률은 현재의 52.9%에서 사업 최종연도인 2017년에는 58.3%로 5.4%가 대폭 향상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 외에도 산학협력 연계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사회와 기업이 요구하는 실무형 인재양성을 위해 기업 관계자와 동문 중 멘토를 위촉하여 재학생들의 경력개발을 돕는 ‘CCSP(Catholic Career Success Program)’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미취업 졸업자들에게는 취업역량강화 교육 및 인턴십 기회를 제공하는 ‘학사후애(愛)’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ACE(Ace of Catholic Ethical Leaders) 프로젝트’는 매학기 7주간 합숙 취업캠프, 집합교육, 그룹별 컨설팅과 스터디를 통해 희망 직무별 교육과 활동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입니다.
월간HRD / 타 대학과 차별되는 교육 특징 및 강점에 대해 설명해주십시오.
박영식 총장 / ‘수요자 관점의 교육’을 실시하는 것이 가톨릭대 교육의 핵심입니다. 학생관점에서 대학을 경영하고, 이를 통해 학생, 학부모, 기업이 원하는 수요자 중심의 교육을 하고 있습니다. 학생들이 자신들의 요구와 관심에 부합하는 교과목을 선택할 수 있는 학사제도, 사회와 학생의 수요를 충분히 반영한 교과목의 개설 및 학과의 특성화가 중요합니다.
‘잘 가르치는 대학’,
즉 학부교육 선진화 선도대학으로 선정된 가톨릭대는 사회와 학생의 요구에 충분히 부합할 수 있는 유연한 교육과정 확립을 우선적 목표로 삼고 있습니다. 지난해부
터 실시 중인 융·복합트랙 교과목, 자기주도적 학습커뮤니티, 교수-학생 멘토링제도 등은 수요자 관점 교육 프로그램을 통해 학부교육 모델을 선진화하고 있는 대표적 성공 사례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월간HRD / 대표적 교육 프로그램을 설명해주십시오.
박영식 총장 / 가톨릭대는 외국인 교수와 학생을 국내 캠퍼스로 불러들이는 ‘인바운드(Inbound) 국제화’ 전략을 집중적으로 추진해 성과를 올리고 있습니다. 이
를 위해 가톨릭대가 자체 개발한 집중영어 기숙프로그램 GEO(Global EnglishOutreach)는 이미 수천 명의 학생이 참가하며 효과를 인정받아 성공적 국제화 브
랜드로 자리매김했습니다.
GEO 참가 학생들은 1,100명 수용 규모의 영어 기숙사 김수환추기경국제관’에서 회화수업뿐 아니라 팝송, 프레젠테이션 등 다양한 클럽활동에 참여하며 24시간 영어로 의사소통하게 됩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학생들은 다문화 환경에서 편견 없이 타문화를 받아들이며 외국인과 소통하고 화합을 이끌어낼 수 있는 리더십을 가진 인재로 성장하고 있습니다.
월간HRD / 최근 개강한 한류대학원의 설립 취지와 향후 계획에 대해 알려주십시오.
박영식 총장 / 오늘날 세계 속에서 한국은 ‘한류’라는 브랜드로 통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한류는 이제 첫걸음을 내디딘 상황에 불과합니다. 지금 이 순간이, 한
류를 지속해서 확대하고 발전시키는 방안을 모색해야 할 중요한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이에 가톨릭대학교는 한류를 체계적으로 분석하고 연구하는 한편, 한류를 통
한 국가 경쟁력 창출에 이바지하기 위해한류대학원을 설립하였습니다.
한류대학원의 방향을 논의하면서 생각한 개념이 ‘ATTRACTIVE KOREA’라는 것이었습니다. K-Pop이나 드라마 외에도 끊임없이 다양한 한국의 매력과 역동성을 실
사구시의 관점에서 발굴하고 제시해보자는 것입니다. 아울러 한류 콘텐츠 활용의극대화를 넘어서 산업과 무역, 관광 등의 분야에서 한류를 통해 최대한의 부가가치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글로벌 협력 시스템을 만드는 데 이바지하고자 합니다. 가톨릭대 한류대학원은 한류문화와 한류산업 이해의 지식기반 플랫폼을 제공하고, 문화콘텐츠산업을주도할 창의적 인재를 양성하여 한류 협력 네트워크의 중심이 될 것입니다.
한류대학원은 앞서 말씀드린 인바운드 국제화의 또 다른 큰 축이 될 것입니다.
월간HRD / 사회에서 가톨릭대 학생들의 강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박영식 총장 / 일반적으로 가톨릭대 학생들은 ‘바르고 착하다’는 말씀을 많이 해주십니다. 졸업생들 역시 사회 일선 곳곳에서 제 몫을 하며 기업 인사 담당자들로부터 ‘가톨릭대 출신은 일을 잘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가톨릭대 출신이라면 ‘회사의 금고 열쇠를 맡길 수 있다’고 인정받고 있습니다.
월간HRD / 총장님의 비전, 교육철학에 대해 알려주십시오.
박영식 총장 / 지금 대학사회는 유례없는 변화를 요구받고 있습니다. 이러한 요구에 가장 현명하게 대처하는 방법은 변화를 강요받을 때까지 기다리는 대신 능동적으로 변화를 주도하는 것입니다. 157년 전통의 가톨릭대학교는 ‘인간존중’의 건학이념 아래 인성,지성, 영성을 갖춘 윤리적 인재 양성의 요람으로 자리매김해 오고 있습니다.
최근 ‘바른 변화가 가장 빠른 변화’라는 모토 아래 이뤄진 가톨릭대의 시도들은 이미 다양한 결과를 낳고 있습니다. 교육역량 강화 지원 사업에 5년 연속 선정되었으며, ‘잘 가르치는 대학’을 뽑는 학부교육 선진화 선도대학 사업을 모범적으로 수행하고 있습니다.
또한, 올해 초에는 치열한 경쟁을 뚫고 산학협력 선도대학에도 선정되었습니다. 상당수 대학은 이러한 국책사업을 하나도 유치하지 못했으며, 이 세 가지 국책사업을 동시에 수행하고 있는 대학이 전국에서 몇 군데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대단한 성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희는 지금의 성과에 안주하지 않고 이제 ‘대학 3.0’을 향해 나아가고자 합니다. ‘대학 1.0’은 좋은 프로그램으로 좋은 교육을 하는 대학입니다. ‘대학 2.0’은 학생들이 좋아하는 대학입니다. 많은 대학이 이런 대학이 되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나아가 ‘대학 3.0’은 영혼과 철학이 있는 대학입니다. 이러한 대학이 바로 미래 사회의 선도적 대학이 될 것입니다. 가톨릭대는 다툼과 분열 대신 소통과 화합을 주도하여 서로 믿고 평화롭게 살 수 있는 사회를 건설할 인재를 키우는 대학, 즉 영혼과 철학을 지닌 대학으로 성장해갈 것입니다.
▶ 박영식 가톨릭대학교 총장
현 가톨릭대학교 총장
교황청 성서위원
전 천주교 서울대교구장 김수환 추기경 비서
교황청 성서대학 성서학 박사
가톨릭대학교 종교학과 교수
교황청 우르바노대학교 초빙교수
한국가톨릭계대학총장협의회 초대 회장
글 김현지 | 사진 가톨릭대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