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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철] 2. MECE & Logic Tree 로지컬 씽킹
상사에게 보고서를 제출했다. 잠시 후 상사가 불러 보완해 다시 제출하라고 한다. 이럴 경우, 상사가 주로 조언하는 사항은 무엇일까? 첫째는 내용이 정리가 안 되서 중복이 많다는 것이고, 둘째는 중요한 내용이 빠져있다는 것이다. 즉, 누락이 발생한 것이다. 즉 중복 없이, 누락 없이 작성을 요청한다. 이것이 MECE(미시)이다. 이번호에서는 로지컬 씽킹에 관해 살펴보도록 한다.
중복 없이 누락 없이 MECE로 사고하라
MECE로 분해할 때 사용하는 방법은 보통 3가지다.
첫째, 기존에 존재하는 경영 툴을 사용한다. 3C나 4P, 4M 등 경영적인 툴이 있다. 이것을 활용하여 나누면 MECE가 된다.
둘째, 반대 개념을 도입한다. 위의 반대는 아래이다. 합치면 전부가 되고 서로 중복이 안 된다. 왼쪽의 반대는 오른쪽이다. 이것도 MECE가 된다. 즉, 상호 반대되는 개념으로 양분하면 MECE가 된다. 그것과 그것이외, 질과 양, 장점과 단점 등으로 나누면 된다.
셋째, 구성요소나 순서로 배치한다. 시간과 관련하여 우리는 과거, 현재, 미래로 나눈다. 이 3가지로 구분하는 것이 상식이다. 과과거, 과거, 현재, 미래 이렇게 나누는 경우는 없다. 일반적으로 통용하는 항목으로 나누면 MECE가 된다. 또한 순서로 나누어도 MECE가 된다.
일하는 순서를 Plan→Do→See로 전개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프로세스나 절차, 순서로 나누면 MECE가 된다.
Logic Tree, MECE사고로 분해한 것
Logic Tree란 MECE를 기반으로 큰 것을 작은 것으로 분해해 가는 기술이다. 보통 이렇게 하부 단위로 전개하는 방법을 ‘Breakdown’또는 ‘Drill down’ 이라고도 한다.이처럼 큰 것에서 작은 하부 단위로 분해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가 먹은 음식물은 위로 가기 전에 먼저 입에서 잘게 쪼개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이는 식도가 좁기 때문에 음식물을 작게 만들어야 식도를 통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음식물을 섭취할 때는 식도에서 컨트롤할 수 있는 크기로 음식물을 줄이는 과정이 필요하다.
비즈니스에서의 업무도 이와 마찬가지다. 모든 문제나 과제는 덩어리가 크고 서로 뒤엉켜 있어서 그 자체로는 문제를 풀기가 매우 어렵다. 가급적 개별 업무나 작은 크기로 업무를 쪼개놓아야 해결해 나갈 수 있다. 일단 개별 업무로 분해되면 내가 할 것인지 다른 사람이 할 것인지 역할 분담도 가능하다. 또한 이 일을 지금 할 것인지 나중에 해도 될 것인지 판단할 수 있다. 즉, 실행의 우선순위를 정할 수 있다.
Logic Tree로 작성할 때 1차 전개에서는 무조건 MECE로 구분해야 설득력이 높다. 2차 전개에서는 가급적 MECE로 분해하도록 노력한다. 3차 전개 이후에는 MECE가 되면 좋지만 안 되어도 상관없다. 구애 받을 필요가 없다. 큰 것을 작은 것으로 나눌 때는 2~4개로 나눈다. 5개 이상은 복잡하다.
Logic Tree의 종류
Logic Tree의 3가지 종류를 업무 용도에 맞추어 사용한다. Logic Tree의 종류는 3가지이다.
첫째, What Tree는 과제의 전체 구성 요소를 알아보거나 체크리스트를 작성할 때에 사용한다.
둘째, Why Tree는 과제나 문제의 원인이나 이유를 찾을 때 사용한다.
셋째, How Tree는 과제나 문제에 대해서 해결 대안을 찾을 때 사용한다.
사례는 식자재의 수량이 부족한 원인을 알아보는 Why Tree이다. 1차 전개를 보면 자재를 발주 안 했거나, 발주는 했으나 납품가 안 된 경우, 마지막으로 자재는 납입되었으나 현장으로 지급이 안 한 경우로 나누었다. 프로세스로 분해한 것이다. 2차 전개는 1차 전개의 각 요소 별로 실수한 담당자로 나누어 갔다. 계속 전개하여 최종적으로 12개의 원인 가능 요소를 추출했다.
로지컬 씽킹의 대표 기법은 Logic Tree로 맥킨지가 자랑하는 대표 기법이다. 맥킨지 컨설턴트는 컨설팅을 하든 문제해결을 하든 Logic Tree로 풀어나간다. Logic Tree를 자주 사용하면 생각이 논리적이고 체계적으로 변한다. 이 기법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 업무 성과를 내야 한다.
글 이호철 비즈센 대표 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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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종] 8. 새로운 한국을 향하여
광복 이후 한국 현대사는 산업화와 민주화의 역사였다. 일제의 음울한 그늘 속에서 튀어나온 변신의 귀재 박정희,‘5공 청문회 스타’노무현 등이 주목받을 만하다.
그들은 우리 시대의 빛과 그림자였다.
‘조국근대화의 기수’박정희 대통령
박정희(1917~1979)의 일생은 권력을 향한 끝없는 질주였다. 그의 변화무쌍함은 복잡다단했던 20세기 한국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일본강점기 때 그는 초등학교 교사로 직업 세계에 뛰어들었지만 곧 일본군 장교로 옷을 갈아입었다. 일제가 패망하자 그는 천연덕스럽게도 광복군의 일원이 되어 돌아왔다. 그는 곧 대한민국국군 장교로 변신했다. 세상이 좌익으로 기울자 이번에는 그쪽을 기웃거리다가 하마터면 패가망신할 뻔하기도 했다. 요행히 살아남은 그는 반공전선에 합류해 금세 장군까지 올랐지만, 그에게만족이란 없었다. 전후의 혼란을 틈타 쿠데타를일으키고 대통령이 되었다. 그것도 두세 번으로그치지 않았다. 헌법까지 바꿔가며 권력의 철옹성을 쌓고 스스로 영구 집권을 보장했다. 그의 일생은 평범한 사람으로서는 일생에 단 한 번도 성사되기 어려운 곡예들로 점철되었다.
곡예사 박정희의 승부처는 5.16쿠데타였다. (1961)
이 사건은 한국 현대사의 일대 비극이었고, 그에 관한 논란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5.16이 있었기에 역사적 박정희가 존재한다는 점이다.
그의 집권 기간은 조국 근대화, 즉 산업화의 시기였고, 그는 그 ‘기수’를 자처했다. 그 자신도 그랬지만 그의 지지자들 역시 산업화에 미친 그의 막대한 공로를 내세워 군사 독재 정치의 그림자를 덮고자 한다. 그러나 이 문제 역시 그들의 뜻대로 쉽게 해결되지 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박정희식 산업화는 한국 현대사에 깊은 시름을 더했기 때문에 논란이 그치지 않는 것이다.
가. 역사의 한복판으로 과감히 뛰어들다
박정희의 5.16쿠데타를 지식인들은 당연히 반대했다. 그러나 가난에 시달리던 농민들과 도시의 서민들은 이것이 혹 반전의 계기가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했다. 박정희가 노린 점이 바로 그것이었다. 쿠데타를 일으킨 청년 장교들은‘민족중흥’을 외치며 혁명 공약을 쏟아냈다. 장면 정부의 경제개발계획(경제재건 계획)도 군인들의 전리품이 되고 말았다. 지금도‘5개년 경제개발계획’이라면 누구나 군사 정권을 떠올리지, 장면 정부를 생각하지는 않는다. 사실 경제개발계획이란 세계적 유행이었다.
가령 유럽의 경우만 보더라도 이탈리아의 바노니플랜(1955~1964), 프랑스의 10개년 전망(1955~1965), 네덜란드의 장기 전망(1959~1970) 등이 있었다. 그런데도 많은 국민은 박정희와 경제개발계획을 동일시한다. 그의 성공은 자기선전의 결과이기도 했다.
나. 불요불굴의 의지로‘한강의 기적’을 이루다
대통령 취임사에서 박정희는 자주, 자립, 안정을 위해 정신 혁명을 일으키겠다고 다짐했다. 경제 발전과 한일국교 정상화는 최우선 국정 과제였다.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하지만 박정희는 굽히지 않았다. 과단성과 불굴의 의지로 산업화를 적극 추진했다. 이는 그의 집권 명분이기도 했다.
산업화에는 적절한 기반 시설이 필요했다. 기술도 노동력도 자본도 필요했지만, 노동력을 제외하고는 이렇다 할 것이 없었다. 그래서 박정희는 일본이라는 카드를 떠올렸다. 두말할 나위 없이 일본은 그에게 결코 낯선 국가가 아니었다. 당시 일본은 전쟁의 잿더미에서 일어나 경제기적을 달성했다. 그들은 또다시 식민지의 역할을 떠맡을 대한민국이 필요했다. 박정희로서는 저들의 투자가 있어야만 한국 경제가 재건될 수 있다고 확신했다.
정치적 걸림돌로 작용하는 한일 양국의 단교 상태를 극복하는 일이 급선무였다. 박정희는 빗발치는 반대 여론에도 자신의 소신대로 밀고 나갔다. 박정희식 통치술의 생명은 바로 불요불굴에 있었다.
또한 박정희는 미국과의 공조 체제를 강화하기위해서 적극적인 조치를 했다. 1960년대 초반 미국을 가장 괴롭힌 문제가 베트남전쟁이었다. 월맹군의 남침을 차단하지 못할 경우, 인도차이나 반도 전체가 공산화되고 말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미국은 우방의 도움이 필요했다. 그러나 어느나라도 선뜻 나서지 않았다. 박정희는 거기서 하나의 기회를 읽었다.
‘국군의 베트남 파병을 통해 우리는 미국에 보다 많은 요구를 할 수 있다.’이런 판단을 기초로 그는 베트남 파병을 성사시켰다. 한동안 미국은 그에게 정치적 힘을 실어 주었다. 비판적으로 보면, 이는 제국주의의 신판이나 다름없다. 국내의 정치적 책임과 부담은 박정희가 떠맡는 대신, 약간의 정치 경제적 보상이 박정희 정권에 주어졌다. 그 결과 한국 경제는 빠르게 성장했다. 이는 거대 자본을 소유한 미국과 일본 등에 투자 이익 상의 성과를 보장했다. 특히 강대국 미국에는 결정적으로 많은 이익을 제공했다.
박정희가 이끈 한국의 산업화를‘한강의 기적’이라고 부른다. 긍정적으로 보면, 한국은 그때 이르러 산업화의 확고한 기틀을 마련했다. 외채가 부쩍 늘고 정경 유착에 따른 부패도 없지 않았으나, 중요한 기반 산업 시설이 그 시절에 갖추어졌다. 한국은 선진국의 하청 국가 신세를 쉬 벗어나지 못했지만 경제 성장은 한국 사회 일각에 번영을 선사했다. 한국은 후발 산업 국가 중에서는 기장 모범적인 국가로 성장했다.
한국의 산업화를 논하는 사람은 누구나 박정희를 언급한다. 그에 대한 평가는 평자의 관점에 따라 전적으로 달라진다. 논란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다. 박정희 신화의 비밀들
박정희의 인기는 여전히 지속된다. 무려 18년 동안 장기 집권을 하고, 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내몰았음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그 인기의 비결은 무엇일까.
박정희의 삶과 그의 독특한 성격에서 발견되는 매력 때문일 것이다. 그는 과감했고, 청렴하고, 충직한 느낌을 주는 특이한 사람이었다. 그가 매사에 정직했다고 믿을 만한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하지만 그의 변명에는 늘 일리가 있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그에게 매료되었다. 탁월한 조직 관리 능력도 그의 인기 비결이었다. 그는 적과 아군을 뚜렷하게 구별하고, 적을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또한, 승리로 얻은 자원을 추종자들에게 적절히 분배해줌으로써 그는 끈끈한 충성관계를 형성했다.
정확한 통찰력과 민첩함도 그 인기의 원천이었다. 시대의 물결이 어디를 향해 흐르는지를 그는 정확하게 파악했고, 누구보다 빠르고 단호하게 대처했다. 한일 국교정상화 같은 문제는 대다수 국민이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서둘러 관철했다. 거기에 자신의 정치적 미래가 달려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망설임이 없었다. 확실히 박정희는 요지부동의 인물이었다.
이는 그의 장점이자 또한 치명적인 단점이었으며, 한국의 역사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이례적인 경우였다. 그래서 또 많은 사람이 아직도 그를 그리워하는지도 모르겠다.
노무현 대통령, 민주적 리더십의 가능성을 펼치다
노무현의 소탈한 말씨와 표정은 한국 현대사에 긴 여운을 남긴다. 탈권위주의의 상징이었던 그는 반대파들에게는 늘 조소의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노무현은 시민사회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 대통령이었을 때조차 비주류였던 그의 삶이 시선을 끄는 이유도 그것이다. 시민은 민주적 지도자의 출현을 기대했다. 여기에 부응한 이가 노무현이었다. 그는 군사 독재시절 민주 변호사를 했다. 또한, 전두환 독재 정권(제5공화국)의 반민주적 악행을 단죄하는 국회 청문회에서 가장 두각을 나타낸 스타였다.
그의 날카로운 언어와 소박한 성품은 권위주의시대의 종말과 민주시민 사회의 개화를 알리는전령사였다. 그는‘노빠’로 불리는 시민적 응원군을 몰고 다니는 민주적 카리스마를 한국 현대사에 선보였다. 허울뿐인 이 고학력 사회에서 시민은 명문대학 아니면 안 된다는 선망과 일종의 좌절감이라는 모순에 빠져 있었다. 상고 출신 노무현이 독학으로 그 어려운 시험을 거쳐 변호사가 되었다는 사실. 그런 그가 무료 변론을 일삼는 인권 변호사가 되었고, 국회 청문회에서 전두환을 벌벌 떨게 했다는 사실. 이런 일련의 상징적인 사건들을 통해 시민 사회는 노무현에게서 동질감과 희망을 발견했다. 그들은 젊은 노무현에게서 신뢰의 가능성을 확신했다.
가. 시대의 목소리를 알아들었다
노무현은 대단히 솔직하고 용기 있는 정치가였다. 비판자들은 그를 두고 철이 없다고 하지만 그와 같이 정직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용기 있는 태도를 여러 차례 공개적으로 입증했다. 가령 그의 정치적 대부인 김영삼이‘3당 합당’으로 신군부 잔당들과 야합하자, 그는 단호히 선을 긋고 결별했다. 신념을 위해 정치적 자살 행위도 마다치 않았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그 자신이 부산 사람임에도, 자신에게 유리한 지역감정의 구도를 적극 부정했다. 그는 출신과 무관하게‘새정치국민
회’총재 김대중을 지지했다. 실익만 추구하는 한국의 정치 관행으로 볼때 연달아 자살골을 차 넣은 셈이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노무현의 힘이었다.
그는 사소한 이해관계에 구애받지 않았다. 가슴으로 시대의 목소리를 듣는 큰 정치가 노무현다움이 바로 거기에 있다. 21세기 한반도의 주요 의제는 평화통일이다. 전쟁만은 어떤 경우에도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현실은 어떤가. 휴전선을 따라 200만명을 헤아리는 중무장 병력이 남북 양쪽에 대치중이다. 60년가량 이런 비상사태가 연출되고 있다. 세계사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이상 현상이다. 이것이 남북한의 정상적인 사회 발전에 걸림돌인 것은 당연하다. 그런 점에서 김대중과 노무현 대통령이 추구한‘ 햇볕정책’은 좌우의 정치적 이념과 무관하게 계승되어야 할 시대적 사명이다.
나. 독창적인 캐릭터로 역사에 승부수를 던지다
노무현의 정치적 이념은 편협하지 않았다. 그는 통합적 성격을 지닌 독특한 캐릭터였다. 대통령 재직 시절에도 반대파는 그를 좌파로 분류했지만, 실상은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누구보다 정열적으로 신자유주의 경제 정책들을 추진했을 때, 그는 더는 노동자와 농민의 편이 아니었다. 차라리 재벌의 편에 가까웠다. 그의 세계관은 복합적 구조물이다. 성품이 과감하고 소탈했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투박해 보이는 그의 정치적 언변은 정교하게 계산된 것이었다. 그의 독창적인 논리 자신을 다수의 적대자로 만들기도 했고, 그 다수를 친구로도 삼을 만큼 위력적이었다. 탈권위를 내세운 노무현은 기존의 정당 구도를 거듭해체함으로써 자신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정치 질서를 추구했다.
그럼으로써 정계에 입문한 이래로 항상 극단적인 지지자와 비판자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그에게는 확실히 선동가로서의 면모가 있었다. 그럼에도 그만큼 인권과 민주주의의 의미를 깊이 이해하고 존중한 정치가는 드물다.
다‘. 바보’노무현의 매력
평생 그는 권위주의를 상대로 싸움을 벌였다. 그가 인권 신장에 이바지한 점, 탈권위적 정치문화 형성에 이바지한 사실은 오래 기억될 것이다. ‘대화와 토론’을 유난히 강조한 그의 화법은 직설적이었다.“ 대통령 못 해먹겠다”“, 미국 응딩이 뒤에 숨어서”와 같이 공인으로서는 차마 입에 담기 어려운 특유의 직설법으로 그는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권위주의를 청산하기 위한 그 나름의 전략이었다.
또한 그는 수난과 굴욕의 대통령이었다‘. 공직선거 및 선거부정방지법’이 정한 중립 의무 및 헌법 위반 혐의로 대통령 권한이 일시 정지된 적도 있었다(2004). 잘못된 판단으로 신자유주의에 찬동해 한미자유무역협정을 추진했고, 이라크 파병을 해 시민의 비판을 사기도 했다.
한마디로 그는 극히 개성적인 지도자였다‘. 바보노무현’이라는 애칭이 시민 사이에 회자될 만큼 충실한 민주주의자였다. 그를 폄하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생전에는 물론 사후에도 그는 여전히 논란의 중심에 서 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누구도 노무현처럼 당위의 가치를 믿고, 서슴없이 낭떠러지로 뛰어내리기가 쉽지 않다
는 것이다. 그는 사랑스러운‘ 바보’였다.
연재를 마치며
돌이켜보면, 탁월한 리더십으로 역사의 승부처마다 국가와 민족의
장래를 결정지은 인물들이 많았다. 알면 알수록 그들의 삶과 전략
은 후세에 길이 남을 지혜와 용기의 정화였다. 봉우리가 높을수록
골짜기도 깊다. 그들의 공과를 둘러싼 논란은 끊이지 않겠지만, 앞
선 그들의 발걸음은 우리를 이끄는 나침반임이 틀림없다.
글 백승종 마을공동체문화연구소 대표(전 서강대학교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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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엔카 일산직영센터 올가밴드] 음악의 테두리 안에서 우리는 자유다
거침이 없다. 넥타이를 두르고도 이토록 자유로울 수 있을까? SK엔카 일산직영센터의 사내동호회 올가밴드의 남자들은 ‘음악의 테두리 안에서 우리는 자유다! ’를 외치며 불월(불타는 월요일)을 보내고 있었다.
“기사에 직책은 다 빼주세요. 밴드는 어떤 것에도 구애받지 않는 편한 자리이기도 하고 퇴근 이후의 시간을 활용하기 때문에 우리끼리는 형, 동생 해요. 기사에도 그냥 아무개 씨로 호칭해 주시는 게 자연스러울 것 같아요.”올가밴드의 리더인 이태성 씨(!)가 인터뷰를 위해 마주 앉자마자 대뜸 말했다. 자유롭다 못해 호탕하다. 나누는 말이 더해질수록, 함께 있는 분초가 쌓일수록‘ 아, 이게 올가밴드구나!’ 싶었다.
‘올(all), 가(가능할 가, 可)’,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뜻의 올가밴드는 SK엔카 일산직영센터의 사원~대리급 직원들이 지난 2010년 초 모여 만든 사내동호회다. 기타, 베이스, 드럼 단 세 명의 멤버로 시작, 보컬이 없어 합주 연습만 하던 밴드는 이제 보컬 담당 멤버 둘이 늘어 제법 모양새를 갖췄다.
기자가 올가밴드의 연습 현장을 찾은 것은 10월의 어느 월요일 늦은 저녁. 그러나 올가밴드 멤버들의 낯에서는 피곤한 기색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 흔한 직장인 월요병도 이들만은 비껴가는 듯했다.
“올가밴드는 단순히 음악을 즐기기 위해 만들었어요. 영업직이라 고객들을 늘 만나다 보니 스트레스가 많아요. 옛날에는 다른 영업직들처럼 술로 스트레스를 풀었는데 나이가 들면서 몸이 상하더라고요. 그래서 찾은 게‘ 음악’이었어요. 음악으로 스트레스를 풀자! 이런 취지로 결성됐어요.”밴드의 리더이자 기타를 맡은 이태성 씨가 말했다.
“음악의 테두리 안에서 우리는 자유다! 음악을 하면서 스트레스받지 말자. 이거죠.”드럼과 키보드를 담당하는 김지수 씨가 거들었다.
사내 밴드 공연, 재미는 물론 추억은 덤
올가밴드는 지난해 사내 송년의 밤 무대에 올랐다. 멤버 모두가 기억에 남는 공연으로 꼽은 이날의 사연은 이러하다. 5백여 명의 관객을 대상으로 하는 공연은 처음인지라 잔뜩 긴장한 멤버들은 공연 전 소주를 한 병씩 마셨더랬다. 긴장 완화에는 탁월했지만 문제는 공연 중에 발생했다. 윤도현의‘ 나는 나비’를 연주하던 중‘ 삑사리’가 난 것. 난감해하던 밴드에 관객들은‘ 괜찮아, 괜찮아’를 연방 외쳐주었단다. 밴드와 관객이 하나 된 순간, 밴드도 관객도 SK엔카라는 지붕 아래 어우러져 사는 사람들. 그 단합의 밤은 추억으로 남았다.
“송년 행사에 연예인 부르면 물론 좋죠. 하지만 연예인의 공연은 잠깐의 재미잖아요. 사내동호회가 공연하거나, 직원들이 장기자랑을 하면 재미뿐만 아니라 추억도 남아요. 그래서 더 좋다고 생각해요.”
멤버들은 회사 내‘ 진짜 친구’
SK엔카 직원들은 가정의 날인 수요일이면 조기 퇴근을 한다. 이에 올가밴드도 처음에는 매주 수요일 퇴근 후 연습을 했으나, 지금은 2~3주에 한 번씩 모여 느낌이 이끄는 대로 음을 맞춘다. 자정을 훌쩍 넘기기도 하고, 일찍 파하여 술잔을 기울이기도 한다. 베이스를 맡은 김재상 씨는 “사실 회사에서 다른 부서 선배들과 친해질 기회가 별로 없다”며 “밴드 활동을 하면서 회사 선배들과 친해질 수 있어서 좋다”고 말했다.
올가밴드의 멤버들은 저마다 하는 일도, 직책도 다르다. 하지만 올가밴드라는 이름으로 모이면 끈끈한 우애로 맺어진 형, 동생 사이가 된다.
밴드 내 만년 막내인 신기철 씨는 보컬 외에도 매니저를 자처했다.“ 제가 없으면 이 사람들이 밥도 못 먹고 하거든요. 김밥을 사고 고장 난 앰프를 만지거나 합주실을 예약하는 건 제 몫이에요. 밴드가 저를 필요로 하니까 오는 거죠.” 이게, 올가밴드다.
혹여나 무대에서 이들을 볼 기회가 있을까 궁금해서 물었다.
“아직은 정해진 바가 없어요. 연말에 하게 될 수도 있겠죠. 대규모 공연요? 큰 공연은 욕심 없어요. 공연으로 밴드를 보면 심적 부담감이 커져서 오히려 스트레스가 돼요. 그냥 즐기면서 오래오래 하고 싶어요. 아, 기사에 이거 좀 써주세요. 사내 합주실을 언젠가 만들고 싶다! 저희 바람입니다.
글+사진 김민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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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세형] 선배라는 소명 의식
INSTRUCTOR는 기업 내 돋보이는 사내강사를 만나는 코너다. 그런데 조세형 삼성SDS 차장은‘사내 강사라기보다 사내작가로 불리고 싶다’고 꾹꾹 힘주어 말한다. 이미 두 권의 책을 낸 저자이기도 한 그는 작가의 콘텐츠로 후배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강단에 선다. 선배라는 소명 의식으로.
조세형 삼성SDS 차장은『회사에서 통하는 커뮤니케이션』,『 5년은 먹고 들어가는 신입사원 5주 훈련소 』 (위즈덤하우스)두 권의 책을 펴냈다. 제목이 함축하듯 그는 주로 삼성그룹의 신입사원을 대상으로‘소통’을 강의한다. “허준의 동의보감에‘通卽不痛, 不通卽痛’이라는 말이 있어요. 통하면 아프지 않고, 통하지 않으면 아프다. 의학서적이니 동맥, 혈의 흐름을 이야기한 것이겠지만, 소통에 대입해도 맞는 말이에요. 소통을 잘하면 문제가 생기지 않고 설령 문제가 생긴다 하더라도 건강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지만, 소통을 하지 않으면 비록 작은 문제일지라도 조직이 삐거덕대며 구성원이 고통을 받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거창하게‘소통’이란 키워드를 공중에 띄워놓고 책을 쓰거나 강의를 하려던 건 아니다. 삼성그룹 인트라넷의 임직원 블로그에 일상에서 겪은 내용을 업무와 연관 지어 2~3년간 글을 연재했다. 가령 낮에 들른 편의점에서 봤던 아르바이트생과 사장의 대화를 옮겨 적고 보고의 방법을 추리는 식이었다. 그러다 임직원 파워블로거로 선정됐고, 조차장의 멘토 선배가 블로그 내용을 책으로 출간해 볼 것을 권유했다. 보고, 메일 교환, 프레젠테이션 등을 책 한 권에 엮기 위해 공통의 상위 개념을 찾아야 했는데‘ 소통’이 마침맞았다. 그렇게 소통을 말과 글로 전하는 삶이 시작됐다. 멘토선배의 한 마디가 그를 이전과 다른 길로 이끈 셈. 그래서인지 사회생활에서 멘토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깊이 인식한다.
“회사에 처음 들어와 만난 멘토의 스타일이 사회생활에 정말 중요해요. 그때 배운 업무 스킬과 소통 지수가 그 사람에게 대단한 영향으로 남게 되거든요. 처음에 얼마나 소통을 잘 배우는지가 중요한 항목이 되죠. 그게 멘토의 역할이고요”.
조세형 차장은 신입사원을 대상으로 강의를 시작하기 전 항상 칠판에 본인의 핸드폰 번호를 큼지막하게 적는다. 중간에 라도 질문이 생기면 언제든 문자 메시지를 보내라는 의도다. 그러면‘ 삼성맨은 LG 옷 입으면 안 돼요?’‘, 상사와 밥 먹을때 메뉴 선정은 어떻게 해야 하나요?’등 의 일상적인 궁금증부터 업무에 관련된 조언 요청까지 20~30통의 문자 질문이 쇄도한다. 회사 생활을 하면서 누구나 한 번쯤 묻고 싶었으나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던 사소한 물음에 조 차장은 친절히 설명해 준다. 자연스레 그를 멘토로 따르는 후배들이 생겼다.
“후배들에게 블로그를 하라고 특히 권해요. 회사에 들어오면‘ 글쓰기’가 정말 중요하잖아요. 글을 쓰는 건 내 생각을 논리적으로 말하는 창과 같은 역할을 하고, 책을 읽는 건 방패 역할을 해요. 근데 블로그는 글쓰기를 연습할 수 있는 좋은 도구예요. 저도 책을 내기까지 블로그 득을 크게 봤고요. 또 블로그는 나만의 콘텐츠를 가질 수 있는 좋은 공간이기도 하죠.
‘나만의 콘텐츠는 무엇일까’에 대해 많이 고민해 보라고 요구해요.” 실제로 조 차장은 사내 블로그 외에도 검색 포탈에‘ 이 안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라는 뜻의‘ 웰컴이안’이라는 아이디로 동명의 개인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다. 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 사람과 소통하는 순간이 가장 즐겁다는 이가 조세형 차장이다.
16년 차 중간관리자로서 사내강사로서, 또 작가로서 부지런히 시간을 꿰고 있는 그의 다음 행보가 기대되어 물었다. “출판사나 독자들이 직장인 저자에게 바라는 부분이 있어요. 그러한 콘텐츠를 집어내서 앞으로도 계속 책을 쓸 계획이에요. 요즘 대부분 직장인이 자기계발을 하는데, 저는 1~2년에 한 권씩 책을 쓰는 저술 자기계발을 하고 싶어요. 그래서 사내강사라기보다는 사내작가로 불렸으면 좋겠어요. 작가의 콘텐츠로 후배들에게 도움을 주는 강의라면 마다하지 않을 겁니다.”
글 김민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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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정재] "제조업체 HRD의 해답은 현장에 있습니다"
만도는 ABS(Anti-lock Brake System), ESP(Electronic Stability Program) 등과 같은 첨단 안전장치들을 국내 최초로 개발·생산해 온, 한라그룹의 자동차 부품 제조업체다. 4천여 직원의 인재개발을 맡고 있는 신정재 인재육성팀 팀장은“제조업체 HRDer는 현장의 전략적 과제 해결을 함께하는 파트너가 되어야 한다”며 “업의 본질에 대해 이해하고 경영이슈에 깨어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경기도 성남시 판교에 새로 건립한 만도 Global R&D Center에서 신정재 팀장을 만났다. 신 팀장은 만도 인재육성팀을 이끄는 한편, 기흥에 짓고 있는 한라그룹 연수원 건립추진태스크포스팀(TFT)의 실무 책임을 맡아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 평택, 기흥 등으로 흩어져 있던 부서들이 한 데 모인지 한 달이 채 안 됐어요. 바뀐 업무 환경에 적응하랴, 일하랴 저를 포함해서 우리 팀원들 모두 정신이 없죠.”
인터뷰에 앞서 신 팀장은 두 손에 연한 커피와 진한 커피를 한 잔씩 들고와 어떤 것을 마시겠느냐고 물었다. 상대의 취향을 배려하는 마음, 팀원의 온도를 살피는 리더십. 그가 가진 이야기가 궁금해 조바심이 났다.
맨땅에 헤딩, 공대 출신이 HRD를 배우는 방식
15년째 HRDer로 살고 있지만, 신 팀장은 단 한 번도 HRDer로서의 삶을 그려본 일이 없다. 1998년, 몸담고 있던 경영혁신팀이 해체되면서 신설된 조직문화파트에
지원했다. 애초 조직문화파트는 1~2년 후 기업문화팀으로 정식 발족할 것이었으나 외환위기가 겹쳐 무산됐고, 신 팀장은 HRD로 직무를 전환했다.
회사의 경영 환경이 좋지 못했으므로 혼자서 HRD 업무를 짊어져야 했다. 타 기업 인재개발원과 국내 굴지의 제조업체들을 직접 찾아가 벤치마킹하고 현장 직원 중심의 HRD 체계를 만들었다. 전문성을 대신할 길은 부지런히 발로 뛰는 열정밖에 없었다. 그때 맺은 인연들이 지금껏 이어지고 있다.
“요즘은 전화나 메일로 업무를 자주 보는데, 직접 사람을 만나고 현장에 가면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어요. 그래서 후배들에게 협회나 오프라인 모임 등에 가급적 많
이 참석하고 적극 활동하라고 독려해요. 특히 HRD는 시시각각 변하는 내·외부 환경에 촉각을 세우고 있어야해요. HRD 하는 사람들이, 생각이 고루하면 그건 수명이 다했다는 거죠.”
그래서 느지막이 대학원도 갔다. 올 2월, 고려대학교 교육대학원 기업교육전공 석사 학위를 받았다. 깨어있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전략적 파트너로서의 HRD에 성큼
신정재 팀장은 제조업체의 HRD 부서가 해야 할 역할로‘현장의 전략적 과제 해결을 함께하는 파트너’를 꼽는다. “교육도 성과에 관한 책임을 요구받잖아요. 그 해답은 현장에 있어요. R&D, 생산, 영업 부서에 있는 사람들을 만나서 얘기하면 거기에 니즈가 다 들어있어요. 그걸 충족시켜줘야 교육과 성과가 동떨어지지 않아요.”
실제로 올해 신 팀장은 영업부서가 고민하는 수주 역량 강화를 위해 HRD를 적극 개입시켰다.
수행 분석, 해결안 도출, 중국 투자법인의 직무 교육 체계 설정과 직무 연수 프로그램 개발 등 HRD적 솔루션을 제시한 것. 전략적 파트너로서의 HRD에 한 걸음 내디뎠다는데 의미가 있었다. “타 부서도 마찬가지지만 HRD 부서는 업의 본질에 대한 이해가 기본적으로 필요해요. 고객이 누구이고 핵심경쟁력의 원천이 무엇인지 파악해서 자사의 장점을 극대화할 수 있어야 해요. 그래서 내부경영이슈보고서 등의 자료에 눈을 뜨고 있어야 해요.
만도의 경우 CEO께서 설계기술, 생산기술, 관리기술을 강조하시거든요. 내년에 한라그룹 연수원이 건립되면 교육 체계와 핵심 교육과정을 대대적으로 수립할 예정인데, 특히 R&D 부문 연구원 육성에 중점을 둘 계획입니다.”
팀원들 이야기로 시작한 인터뷰는 팀원들 이야기로 끝났다. “HRD는 저에게 좌절도 기쁨도 참 많이 줬어요. 제 삶이나 가치관에도 많은 변화를 줬고요. 저희 팀원들이 역량을 갖춘 HRDer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게 제 꿈이에요. 그러면 두고두고 행복할 것 같아요.(웃음)”
글+사진 김민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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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보건의료인력, KOHI에서 나아갈 길 모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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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이 최고의 복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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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경영환경 예측을 통한 HRD 전략과 교육체계 수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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