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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벽] 집단지성에 필요한 세 가지 조율 능력
십 수년 전 “한 명의 천재가 만 명을 먹여 살린다”는 말이 회자되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삼성은 최근에 ‘천재 경영’은 끝났다고 하며 ‘집단지성’이라는 새로운 화두를 꺼내 들었다. 집단지성은 <그룹 지니어스>, <창조적 협업> 등으로 오래전부터 제시됐던 성공전략이다.
왜 한 명의 천재성이 아니라 집단지성일까? 지금은 다양한 실력과 능력과 재능이 있는 사람들이 함께 집단을 이뤄 어울리며 시너지 효과를 내야만, 즉 집단지성을 발휘해야만 문제를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협업과 합심과 융합이 중요한 시대가 왔다.한국은 집단을 매우 잘 이루고 있는 나라다. 그나마 팀워크 문화가 잘 발달해 있어서 그 짧은 시간에 아무것도 없는 최빈국에서 세계가 부러워할 만한 나라로 성장했다. 문제는 여기까지라는 것이다. 팀워크를 하고 난 다음에 노래방, 술집, 단란주점 등 2차 가서 집단지성이 아니라 ‘집단실성’을 하는 바람에 말이다.
한국의 집단은 ‘삼연’으로 이어져 있다. 학연, 지연, 혈연이 그것이다. 거기에 관피아, 공피아, 은피아 등 각종 마피아 같은 이익집단들이 존재한다. 즉 끼리끼리는 그 안에서 신뢰하고 협력하고 충성하지만, 그 이상을 넘어서지 못한다. 더 큰 공동체는 안중에 없어서 자기 집단을 위해서라면 오히려 공동체에 해를 끼치는 일도 마다치 않는다. 삼연으로 얽힌 비리와 이기주의로 인한 집단실성이 더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우리집단의 한계다.
안정기에는 집단이 명확하게 보이는 목표를 향해 구성원끼리 일심동체가 돼 인내심, 충성, 끈기, 열정, 추진력을 발휘한다. 함께 밥을 먹으면서 동질성과 친밀성을 확보해야 발휘되는 능력이다. 그러나 시키는 일을 시킨 방법대로 해오던 획일적 집단의 구성원은 매 순간 새로워지는 창조시대의 위기 상황에 처하면 서로 바라만 보다가 쓰러진다. 변화무쌍하고 예측 불허함에 대처하며 위기를 극복하는 방안은 다른 생각 패턴과 문제해결방식을 가진 사람들이 각자의 의견을 맘껏 발언하는 집단에서 나온다.
그래서 집단지성을 발휘하려면 나와 매우 다른 남과 더불어 일을 할 수 있는 관계조율 능력이 필요하다. 비전공유, 갈등관리, 소통, 배려, 감사, 존중 등 관계를 조율하기 위해서 우리는 각자 동물적인 본능인 이기심과 공격성, 성적 충동을 억제할 수 있어야 한다. 인간은 원초적으로 불안한 존재이기에 그 불안감, 공포감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감정 조절력도 발휘해야 한다. 각종 욕구와 욕정을 잠시나마 미룰 수 있어야 한다. 즉, 자기조율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마음과 행동을 다스리는 자기조율은 어렵다. 왜 그리 어려운 일을 해내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와 가치가 분명할 때에 가능하다. 오로지 자신만을 위하면 결국 모두가 불행해지는 루즈-루즈가 되며, 남을 위해서 자신을 일방적으로 희생하는 것 역시 윈-루즈 이분법에서 벗어나지 못한 발상이다. 서로 약간 양보하는 타협은 양보를 얻어낸 부분보다 양보해준 부분이 자꾸 아쉽게 느껴지기에 장기적인 해결책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공익조율이 필요하다. 각자 국지적으로, 단기적 안목으로 사익을 추구하기보다는 자신보다 더 큰 공동체의 이익을 고려하고, 공동체의 이익이 결국 자신의 이익이 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소위 ‘통 큰’ 계산을 하는 것이다. 공익과 사익 사이에서 갈등하는 게 아니라 둘을 하나로 인식하는 능력이 공익조율이다. 좀 더 멀리 그리고 넓게 보는 글로벌한 비전을 갖추는 것이며, 모두 다 함께 잘 살 수 있는 윈-윈 결과를 내다보는 긍정적이고 창의적인 비전을 지니는 것이다. 우리 모두 자기조율, 관계조율, 공익조율을 발휘해 집단실성에서 벗어나고 집단지성을 이루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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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우량] 생활 속에서 남을 판단하면 안된다.
1931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인도의 시성 타고르는 어느 날 그의 집 마당을 쓰는 하인이 세 시간이 지나도 나타나지 않자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이 놈을 잘라버려야지’ 결심을 하고 있는데 하인이 허겁지겁 들어온다. 앞뒤 생각할 겨를도 없이 벼락같은 소리로 “그만 돌아가게 이젠 우리 집에 올 필요가 없네, 자네는 오늘부터 해고야!” 그러자 하인이 빗자루를 들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어젯밤에 딸아이가 죽어서 아침에 산에 묻고 오느라고 늦었습니다.” 그 말을 들은 타고르는 하인의 손을 잡고 “미안하네, 내가 말을 잘못했네. 용서해주게.” 그날 이후, 타고르는 아무리 나쁜 사람을 봐도, 성급하게 남을 함부로 판단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남의 일에는 내가 모르는 사정(事情)도 있고, 개인적인 사정(私情)도 있고, 얽히고설킨 복합적인 사연도 있을 수 있다는 뜻이다.
물론 사람을 판단해야 하는 권리나 책임이 있는 자리에 있을 때는 다르다. 예컨대, 학교에서 학생의 담임을 맡았으면 학생을 판단(평가)할 책임이 있고, 무슨 게임의 심판을 맡았거나 감독을 할 때도 판단(평점)을 해야 하고, 선거 때의 유권자도 할 수 있고, 법정에서 재판을 하는 사람도 판단해야 한다.
시골 사랑방이나 다방, 휴게실에서 한담조로 이야기를 하거나 신문에 나온 사람 이야기를 할 때에도, ‘나의 생각’이란 전제를 깔고 말할 때는 판단할 수 있다. 그렇게 해야 여론이 형성되기 때문이다. 남의 이야기라도 덕담 수준의 이야기는 편하게 할 수 있지만, 덕담이라도 선거 때의 경우처럼 그 말이 경쟁자에게 피해를 주는 말이면 앞뒤를 가려서 해야 하고, 비판(비난성)적인 말일 때는 더욱 내용을 잘 알고 말해야 함은 물론, 자기의 신분이나 청자(聽者)의 수준과 처지까지도 생각해보고 말해야 한다.
사람은 말할 줄 아는 동물이다. 글은 말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므로 넓은 의미로 보면 글도 기록된 말이다. 말이 없으면, 정치도 경제도 안되고, 문화도 종교도 안 된다. 인간생활에서 성공이나 행복을 추구할 때, 말보다 더 편리한 수단은 없다. 그러나 말을 잘못 사용하면 말보다 더 독하고 악한 것도 없다. 말은 어휘도 잘 선택해야 하지만 때와 장소도 가려야 하고 논리에도 맞아야 한다. 사람이 상호 간에 오해를 하는 것도 말 때문이고, 원한을 품는 것도 말 때문이고, 싸움이 되고 원수(적)가 되는 것도 말 때문이다. 같은 논리로 상대를 설득하고 이해시키고 나와 친근하게 되는 것도 말로 하는 것이고, 화해가 되고 나와 한편이 되는 것도 말 때문이다.
말을 할 때는, 오해의 우려가 있거나 기분이 상할 말은 삼가야 한다. 부부 간에도 그렇고 부자나 형제 간에도 그렇다. 말은 두, 세 사람을 건너가면 과장될 수도 있고 거두절미가 돼 오해되기 쉽다. 동창 간에도 그렇고 선후배 간에도 그렇다. 세월이 가고 나면 의미나 해석이 달라질 수도 있고, 자기가 한 말에 묶일 수도 있다. ‘말이 씨가 된다’고 하니 어떤 결과가 나올 것인지도 생각해봐야 된다. 그래서 공자는 삼사일언(三思一言·세 번 생각해보고 한마디 하라)하라 했고, 불재기위불모기정(不在其位不謀其政·그 자리에 있지 않거든 그 사람의 이야기를 함부로 하지 마라)이란 말도 있다. 이 말은 사람마다 각자 독특한 사정이 있으며 타인은 그것을 절대로 알 수 없다는 뜻이다. 판단을 함부로 하지 말아야 한다. 성경에도 ‘남을 판단하는 자는 저도 판단을 받을 것'이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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