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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2-07-11 14:0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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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세기 말 한국사회는 또 한 차례 역사적 전기를 맞았다. 공민왕 때부터 시작된 개혁의 기운이 드디어는 조선왕조의 창업으로 발전하였다. 그 변화의 중심에 정도전이 있었다. 정도전은 성리학적 이념을 토대로 정의로운 세상을 열고자 하였다. 그러나 정치적 암초에 걸려 그 뜻을 제대로 펴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무언중에 그 뜻을 계승하여 더욱 발전된 모습으로 제시한 이가 세종대왕이었다. 세종은 무슨 일을 하든지 백성을 위해 온 힘을 다했고, 마침내 한글까지 창제하였다. 새로운 문자를 통해 백성이 마음껏 자신들의 뜻을 표현하게 하고 싶었던 세종의 깊은 뜻은 한국문화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다. 역사의 긴 흐름에서 볼 때 세종의 리더십은 백성의 세계관까지 근본적으로 바꿔놓았다.

  조선왕조의 설계자 정도전(鄭道傳, 1342~1398). 정확히 말해 그는 노비였다. 그 어머니에게 노비의 피가 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4세기 후반 고려에서는 정도전처럼 신분에 하자가 있는 사람들도 관리로 출세할 수 있었다.
  정도전을 발탁한 것은 공민왕이었다. 왕은 유능한 젊은이들을 등용해 고려사회를 과감하게 개혁하려 하였다. 정도전은 정몽주, 이숭인 등과 함께 공민왕의 개혁정책에 찬동했다. 왕은 그들에게 유학진흥의 임무를 부여하였다.
  공민왕이 죽고 구 귀족들이 집권하자 정도전은 용납되지 못하였다. 그는 멀리 회진현(전남 나주)으로 유배되었다. 거기서 정도전은 백성의 삶이 얼마나 피폐한지를 몸소 경험하였다. 그들의 어려운 처지를 속속들이 이해하게 된 정도전은 민본(民本)의 유학자가 되었다.



국가는 백성을 보호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그의 민본사상은 《경제문감》에 구체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대저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다. (중략) 옛날 사해를 다스리기 위해 천자가 관작을 설치해 봉록을 지급한 것은 신하를 위해서가 아니라 모두 백성을 위해서였다.” 국가란 백성을 위해 존재한다는 점을 그는 확신하였다. 지배층은 백성의 수고에 힘입어 의식주를 해결하므로, 백성에게 옳은 정치로 보답하는 것이 옳다. 이것이 성리학의 가르침이었고, 정도전은 이를 적극 수용하였다.
  정도전이 꿈꾼 조선은 왕과 지배층의 나라였지만, 그것은 백성을 위한 국가라야 하였다. 그의 정치사상은 14~15세기 세계 어디 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급진사상이었다.

정도전, 이성계를 선택하다
  구 귀족들 때문에 권력에서 소외된 정도전은 정치적 모험을 감행했다. 이성계라는 전쟁 영웅과 힘을 모아 새 나라를 건국할 생각이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전제(田制)개혁, 즉 경제개혁을 중시하였다. 개인 소유 토지를 몰수해 농민들에게 같은 규모의 농토를 나눠 주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가 빈부의 차이를 부정했던 것은 아니다. 다만 누구라도 출발점이 공평한, 기회균등의 사회를 바랐다. 정도전은 지주제도 반대하였다. 소출의 절반을 소작료로 가져가는 것은 착취행위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경제정의를 추구하였던 정도전의 꿈은 그러나, 끝내 실현되지 못했다. 기득권세력의 이익을 위협하는 것이라 하나의 개혁구상에 머물렀다. 그래도 정도전이 그처럼 웅대한 포부를 가졌다는 사실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일이었다.



조선을 설계하다
  1392년 마침내 이성계가 왕위에 올라 새 왕조를 열었다. 정도전은 자신의 이상을 실천에 옮길 수 있게 되었다. 성리학을 바탕으로 그는 새 도읍 한양의 얼개를 짰다. 가령 남쪽 대문을 ‘숭례문’이라 하여, 조선이 예(禮)를 숭상하는 유교 국가임을 밝히는 식이었다. 작은 것부터 큰 것까지 모두 정도전의 손길을 거쳐 조선 500년의 수도 한양이 탄생하였다.
  조선을 철저한 성리학국가로 탈바꿈하기 위해 그는 불교와도 이념적 대결을 사양하지 않았다. <불씨잡변>을 지어 불교를 공박하였던 것이다. 《조선경국전》이라는 일종의 법전도 만들었다. 재상중심 국가를 이상으로 여기는 동시에, 그는 기회균등을 보장할 수 있는 공교육 체제의 완비를 강조하였다. 현대적인 처지에서 보더라도 수긍이 가는 탁견이었다.



잊지 못할 정도전의 리더십
  명나라의 간섭이 커지자 정도전은 태조 이성계에게 명나라의 정벌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그는 또 왕권의 강화를 위해 사병(私兵)혁파를 추진했다. 그러자 이방원(태종)은 자신의 권력기반이 잠식되는 것이 두려워, 왕자의 난을 일으켰다. 세자 방석 등을 살해한 끝에 정도전까지도 처형해버렸다. 이방원은 정도전을 역적으로 몰아 일체의 관직과 재산을 몰수했다. 그러나 정도전을 죽이고도 조선왕조는 그의 공을 부정하지 못했다. 그의 열정과 지략이 없었다면 조선왕조의 개창은 아예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그가 펼친 민본사상은 새 시대의 복음이었다. 그것은 공평하고 정의로운 시민사회를 건설하고자 하는 우리의 염원에도 들어맞는다. 정도전의 굳센 각오와 지략이라면 누구든 자신이 처한 열악한 처지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한글창제로 이어진 세종의 소통 리더십
  세종(재위 1418~1450)은 한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왕 중 왕이다. 통상 그에게는 대왕이라는 존칭이 붙는다. 이상한 일이 결코 아니다. 그는 참으로 위대한 왕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실제로 많은 업적을 남겼다.
  왕은 4군과 6진을 개척해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하는 우리의 영토를 확정지었다. 우리의 음악인 향악뿐만 아니라 중국에서 도입한 아악도 정리했다. 정간보(井間譜)라는 우수한 채보 법도 왕이 직접 창안하였다. 한글도 손수 창제하였다. 예를 들기로 하면 그의 업적은 끝이 없을 정도로 많다. 그토록 다양한 업적이 불과 30여 년의 재위 기간에 다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과연 어떻게 통치하였기에 그것이 가능하였을까.

‘민본’만이 왕자의 길이다
  소년 시절 세종은 누구보다 기회에 민감했다. 그는 정치적 야욕에 불타는 욕심 많고 탐욕스런 왕자이기도 하였다. 결과적으로 그는 양녕대군과 효녕대군을 따돌리고 조선의 왕위를 물려받았다. 왕이 되자 그는 달라졌다. 왕위를 보전하기도 만만치 않은 일인데다, 후세에 이름을 남기는 왕이 되기란 더더욱 어렵다는 사실을 인식했기 때문에 고심한 결과였다. 왕은 민본 즉 백성을 위한 정치에서 자신이 나아갈 길을 찾았다. 세종은 책에서 그 답을 얻었다. 그의 애독서는 유교경전과 역사서였는데, 왕은 같은 책을 수십 번, 또는 수백 번씩 되풀이해 읽었다. 그러면서 왕 자신을 변화시켰다. <서경>에 나오는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다. 그 근본이 튼튼해야 나라가 평안하다”는 말을 수없이 되뇌다가 끝내는 자신의 통치 지표로 삼았다. 왕이 존재하는 이유는 백성의 요구를 해결해주는 데 있다. 위대한 지적 발견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억울한 백성이 단 한 사람이라도 존재해서는 안 된다고 확신하였다. 이러한 세종의 민본사상은 맹자의 혁명사상을 방불케 하였다.



중요한 것은 소통이다
  백성이란 무엇인가. ‘그들은 무지하나 하늘의 뜻이 그들을 통하여 나타나므로 영험하다.’ 이것이 성리학의 가르침이었다. 이보다 백성의 양면성을 더 적절하게 표현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에 공감한 세종은 ‘백성의 무지’라는 문제에 깊은 관심을 뒀다. 그리하여 그들의 무지를 방관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무지한 백성이 잘잘못도 가릴 줄 모르는 상태에서 범죄를 저지르고 벌을 받는 상황이 반복되고 있는 현실을 개선하자! 세종의 마음은 그쪽으로 나아갔다.
  왜, 무엇은 해야 하고, 무엇은 하지 말아야 하는지, 이를 백성에게 일깨우는 것이 세종의 급선무가 되었다. 그런데 백성의 대다수는 글을 읽지 못하였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왕은 직접 <훈민정음>을 창제하였다. 놀랍게도 한글창제는 세종의 성리학적 통치철학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백성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제대로 알려면 문자가 있어야 했다. 왕이 직접 백성을 만나서 의견을 듣는 데는 명백한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백성이 일상생활에서 마음 놓고 사용할 수 있는 문자가 필요했다. 세종의 시대, 즉 15세기에는 이미 일본사람, 몽골사람, 여진 사람들도 제각각 고유 문자를 사용하고 있었다. 조선의 백성만 아직도 문자의 혜택을 받지 못하였다. 세종이 보기에는 여간 답답한 일이 아니었다. 탁월한 언어학자이자 성리철학자이기도 하였던 세종은, 민본의 철학을 실천하는 방편으로 ‘훈민정음’의 창제에 몰두하였다.

사회적 약자인 백성을 보호하라
  그의 민본사상은 추상적인 구호에 그치지 않았다. 정책을 입안할 때마다 왕은 그것이 백성에게 미칠 영향을 미리 따져보았다. 공법(세제)을 바꾸기 전에는 십만 명도 넘는 백성에게 일종의주민투표를 시행하였다. 투표 결과 과반수가 찬성한 것으로 집계되었으나, ‘아직도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다’며 왕은 십 년 넘게 더욱 연구 보완하였다.
  전국의 감옥도 자신이 직접 설계를 변경하였다. 당시 감옥은 위생조건이 열악해, 거기서 죽거나 몹쓸 병을 얻는 사람들도 많았다. 왕은 감옥의 이러한 참상이 법의 취지에서 어긋났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전국의 감옥을 개축하기로 했고, 마침내 실천에 옮겼던 것이다.
  또한, 그는 세상 사람들이 천시하는 관청 여종(官婢)들의 근무조건까지도 일일이 따져보았다. 그리하여 그들이 안심하고 아이를 낳아 기를 수 있도록 장기간의 출산휴가를 지급하였다. 역사상 위엄을 자랑하는 제왕은 많았지만, 세종처럼 백성을 내 몸처럼 보살핀 왕은 없었다.
  그렇다고 세종의 시대가 황금시대였다는 말은 아니다. 그 시대에도 흉년이 주기적으로 되풀이 되었고, 크고 작은 불상사가 간헐적으로 일어났다. 아무리 정성을 다해 다스렸다 해도 왕은 시대와 제도의 한계를 다 넘어 설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러한 한계를 초극하기 위해 세종이 보여준 정성과 노력은 후세 역사가들을 감동하게 하기에 충분하였다.

인재들에게 믿고 맡긴다
  왕은 이른바 ‘독불장군’이 아니었다. 유능한 인재를 발굴해 그들에게 실무를 맡기는 스타일이었다. 왕은 누구보다 인재를 아꼈다. 인재라면 출신도 가리지 않았고, 과거 행적도 불문에 부쳤다. 일단 등용한 인재는 끝까지 신뢰한 것으로도 유명했다. 세종은 주장하기를, 나라의 쓰임을 받지 못한 인재가 길거리를 배회하게 해서는 절대 안 된다고 하였다. 만약 그가 아직도 살아 있다면, 당장에 대통령으로 모셔도 좋은 분이다.
  인재를 골라내는 세종의 안목은 특이하였다. 자신에게도 인간적 결함이 많다는 사실을 순순히 인정한 세종은, ‘나도 이러한데 너희도 당연히 그러할 것이 아니겠느냐’ 하는 견해를 취하였다. 그리하여 신하들에게 일을 맡길 때 그들의 단점을 보지 않고 장점만 취하였다. 그렇게 발탁한 대표적인 인물이 황희였다. 황희에게는 불법과 부정부패사건으로 얼룩진 과거가 있었다. 또 공신 박포가 유배되었을 적에는 그 아내와 간통했다는 소문까지도 있었다. 하지만 왕은 그가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능력이 있다고 확신해 버리지 않았다. 나중에 황희가 정승을 그만두고 은퇴하게 되었을 때, 사람들은 입 모아 그를 ‘훌륭한 재상’(眞宰相)이라 칭송하였다. 세종의 리더십은 황희의 인생을 바꾸었고, 나라를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무에서 유를 창조한 세종의 소통 리더십
  세종이 즉위할 당시 조선은 아직 초창기라 변변한 것이 전혀 없었다. 그러나 세종이 나라를 다스리게 되자 거의 모든 것이 완벽하게 갖춰졌다. 성공의 열쇠는 세종의 리더십에 있었다. 왕은 백성에 대한 사랑(仁)과 정의감(義)으로 세상을 바꾸었다. 그 중심에는 소통능력이 자리하였다. 소통의 달인 세종이 창제한 한글, 각종 문물과 제도, 그가 키운 인재들이 조선왕조를 떠받칠 기둥이었다. 전 세계의 어떤 제왕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왕이었다. 약점과 고난을 극복한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도 그는 표본이 될 만하다. 세종처럼 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성공할 것이다
글 백승종 마을공동체문화연구소 대표(전 서강대학교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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