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다시 학생이 되었습니다.
일을 하면서 HRD를 공부하는 것이니 익숙한 이야기가 많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수업을 들을수록 그동안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들을 다시 질문하게 됩니다.
그중 요즘 제 머릿속에 가장 오래 머물러 있는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사람은 언제 가장 많이 배울까?”
HRD 담당자로 일하면서 저는 자연스럽게 ‘교육’을 먼저 생각해 왔습니다.
조직에 어떤 역량이 필요한지 정의하고, 그에 맞는 과정을 설계하고, 좋은 콘텐츠와 강사를 찾고, 학습자가 효과적으로 배울 수 있는 경험을 만드는 것이 HRD의 중요한 역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최근 ‘일의 교육적 의미’를 공부하면서 조금 다른 관점에서 HRD를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사람은 우리가 만들어 놓은 교육과정보다, 매일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통해 훨씬 더 많은 것을 배우고 있는 것은 아닐까?하고 말이죠.
돌이켜보면 저 역시 그랬습니다.
처음 맡아보는 프로젝트를 어떻게든 완수해 보려고 자료를 찾고, 유관 경험이 있는 담당자분들께 물어보고, 실패한 이유를 다시 생각해 보면서 이전에는 몰랐던 것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예상하지 못했던 문제가 생겼을 때 해결 방법을 찾아보기도 하고, 다른 부서와 협업하며 혼자 일할 때는 알 수 없었던 조직의 맥락을 이해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성공한 일보다 잘되지 않았던 일을 복기하면서 더 많은 것을 배우기도 합니다.
이런 경험들은 대부분 교육장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일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배움입니다.
일터에서 이루어지는 비형식학습(Informal Learning through Work)에 대한 연구에서도 이러한 학습은 공식적인 교육과정 밖에서, 실제 업무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일어나는 학습으로 설명됩니다.
특히 최근의 연구에서는 일을 통한 학습에서 경험을 돌아보는 ‘성찰’, 다른 사람과의 상호작용을 통한 ‘타인으로부터의 학습’, 그리고 새로운 방법을 시도하는 ‘주도적 행동’이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일터는 단순히 배운 것을 적용하는 장소만은 아닙니다.
일터 자체가 하나의 학습 공간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한 가지 중요한 질문이 생깁니다.
그렇다면 일을 많이 하면, 자연스럽게 많이 배우게 되는 것일까요?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같은 업무를 몇 년 동안 반복한다고 해서 반드시 더 깊이 배우는 것은 아니며, 많은 경험을 했다고 해서 모든 경험이 성장으로 이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Kolb의 경험학습이론은 바로 이 지점을 설명합니다.
사람은 단순히 경험하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경험을 돌아보고(Reflective Observation), 그 안에서 의미와 원리를 발견하고(Abstract Conceptualization), 다시 새로운 상황에서 시도해 보는 과정(Active Experimentation)을 거치며 경험을 학습으로 전환합니다.

(콜브의 경험학습 이론)
결국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은 경험을 했는가’보다 ‘그 경험을 어떻게 학습으로 전환했는가’인지도 모릅니다.
현장에서 똑같은 프로젝트를 수행하더라도 어떤 사람은 “이번에도 끝냈다”에서 멈추지만, 누군가는 “왜 이번에는 잘됐을까?”, “다음에는 무엇을 다르게 해볼까?”를 생각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차이가 경험을 단순한 ‘일’로 남길 것인지, ‘배움’으로 전환할 것인지를 결정합니다.
여기까지 생각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제 업무로 질문이 돌아왔습니다.
그렇다면 HRD는 어디까지 관여해야 할까요?
그동안 HRD의 역할을 주로 ‘좋은 교육을 만드는 것’에서 찾았다면, 이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일이 배움이 될 수 있는 조건을 만드는 것’까지 바라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새로운 프로젝트를 맡은 구성원에게 필요한 지식을 교육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프로젝트가 끝난 뒤 무엇을 배웠는지 돌아보게 하는 짧은 회고의 시간이 있다면 어떨까요?
숙련자의 노하우를 과정으로 만들어 전달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하지만 실제 업무 중 막히는 순간에 동료에게 질문하고, 서로의 경험을 공유할 수 있는 관계와 환경을 만드는 것도 중요한 학습 지원일 수 있습니다.
신입이나 주니어에게 업무를 빠르게 알려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스스로 판단하고 시행착오를 경험할 수 있는 적절한 기회를 제공하는 것 역시 성장의 중요한 조건이 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바라보면 HRD의 영역은 조금 넓어집니다.
Course를 만드는 것에서 Experience를 바라보는 것으로,
교육의 순간을 설계하는 것에서 일하면서 계속 배우는 환경을 만드는 것으로 말입니다.
이 질문은 최근 빠르게 확산되고 있는 AI와도 연결됩니다.
AI가 반복적인 업무를 대신하고, 자료를 정리하고, 초안을 만들고, 때로는 사람이 하던 업무의 상당 부분을 수행하기 시작했습니다.
생산성의 관점에서는 분명 반가운 변화입니다.
그런데 ‘일의 교육적 의미’라는 관점에서 바라보니 또 다른 질문이 생깁니다.
우리가 효율화하고 있는 업무 속에는 혹시 누군가에게 필요했던 학습의 과정도 포함되어 있지 않을까요?
주니어가 자료를 직접 찾아보면서 업무의 맥락을 이해하고,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쳐 결과물을 만들면서 암묵적으로 익혔던 것들이 AI를 통해 빠르게 생략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AI가 대신할 수 있는 일을 계속 사람이 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사라지는 업무만큼, 그 업무를 통해 얻었던 학습 경험을 어떻게 다시 만들어줄 것인가라는 질문일 것입니다.
AI로 줄어든 반복 업무 대신 더 높은 수준의 문제를 경험하게 할 수도 있고, AI가 만든 결과물을 검증하고 판단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동료와 함께 문제를 해결하거나 새로운 과제를 맡아보는 경험을 의도적으로 제공할 수도 있습니다.
결국 기술이 일을 바꾼다면, HRD 역시 교육과정뿐 아니라 구성원이 어떤 일을 경험하며 성장할 것인지까지 함께 바라봐야 하는 시대가 오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요즘 저는 교육과 일을 예전처럼 명확하게 분리해서 바라보기 조금 어려워졌습니다.
교육장에서 무엇을 배우게 할 것인가만큼이나, 현장에서 어떤 일을 경험하게 할 것인가가 사람의 성장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조금씩 이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모든 일을 HRD가 설계할 수는 없습니다.
업무를 부여하는 리더가 있고, 일을 수행하는 구성원이 있으며, 각 조직마다 성과를 내야 하는 현실적인 조건도 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HRD의 역할은 모든 학습을 직접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일 속에서 이미 일어나고 있는 배움을 발견하고 그것이 더 좋은 학습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연결하는 것에 가까울지도 모르겠습니다.
저 역시 아직 답을 찾아가는 중입니다.
다만 앞으로 교육을 기획할 때에는 이전에는 하지 않았던 질문을 하나 더 해보려고 합니다.
“교육이 끝난 뒤에도, 구성원이 자신의 일을 통해 계속해서 배우고 성장할 수 있을까?”
어쩌면 HRD가 만들어야 하는 것은 좋은 교육과정만이 아니라,
사람이 일하면서 계속 배우고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인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