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차 산업혁명 시대의 리더상으로 무엇보다 ‘가치관’이 거론되는 시점이다.
아울러 기업에선 자기주도적으로 조직에 몰입하는 인재를 양성하려 한다.
그 맥락에서 우리나라 장인들의 얼과 정신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중에 중요무형문화재 제77호로 활동한 이봉주 방짜유기 명장은 장인정신이 특히 투철하다.
어느새 3대째 가업이 계승되는 중이지만 그는 결코 아들과 손자에게 가문의 업(業)을 강요한 적이 없다.
그저 솔선수범하니 후대가 자발적으로 따라왔을 뿐이라고. 그것은 ‘이끌지 말고 따르게 하라’는 미래 인재육성 전략과도 일맥상통한다.
90년이 하루 같은 명장의 일상
경상북도 문경시 한편에는 유기를 제작하느라 쇠를 두드리는 소리가 한창이다. 바로 이봉주 방짜유기 명장의 공방에서 새어나는 소리다. 올해로 92세에 접어드는 이봉주 옹은 아직도 7시 50분이면 현장으로 나서 유기 제작에 참여하고 있다. 물론 오후에는 휴식을 취하는 편이지만 오전에는 유기 제작의 전반에 관여하며 제자들과 함께한다. 도무지 졸수(卒壽)를 넘은 체력이 라 생각할 수 없다.
“항간에는 제가 유명을 달리했다 합니다. 허허허. 그런데 요즘에도 바쁘면 온종일 일하곤 합니다. 별다른 건강관리법은 없어요. 그냥 한 달에 1회 의사한테 점검받고 음식에 신경 쓰는 정도입니다. 아무래도 업을 계속하다 보니 그것이 활력으로 작용하는 것 같습니다.”
그가 평생을 매진하고, 여생도 집중하는 방짜유기. 그 매력은 특별하다. 방짜유기는 반드시 구리 78%와 주석 22%을 합금한 상질의 놋쇠로 제작된다. 그렇게 정확한 소재와 장인의 손기술이 구현하는 제품을 ‘방짜’라고 지칭한다. 실제로 손메 자국이 드러나는 방짜유기는 우리나라의 식문화를 대표하는 민족의 그릇이며, 선조들의 정신을 머금은 징과 종 역시 방짜제작기술이 스며있다.

일생에 녹아있는 업(業)에 대한 사랑
돌이키면 이봉주 옹이 방짜유기제작의 길로 들어선 지도 어느새 70여 년이다. 그 장구한 세월동안 그는 오롯이 한길을 걸어왔다. 그가 방짜유기제작에 전념하는 까닭은 단순하다. 그저 좋아하기 때문이다. 다만, 그가 방짜유기제작에 몸담은 계기는 우연인 듯 운명 같았다.
사실 그의 고향은 평안북도 정주군이다. 북한은 희망이 없다는 결론에 그는 1948년 월남했다. 일찍이 결혼했기에 아내도 함께 내려오려 했지만 시부모의 만류로 고향에 그대로 남아있게 됐다. 그는 천신만고 끝에 홀로 서울로 도착했다.
하지만 다음으로 어찌할 바를 몰라 막막했다. 그때 아내의 이모부가 남한에서 큰 유기공방을 하고 있다는 기억이 뇌리를 스쳤다. 그는 발품을 팔아 아내의 이모부인 탁창여 방주를 찾아갈 수 있었다.
“탁 방주님은 스승이자 제2의 아버지입니다. 그분이 제게 공방 일을 함께 하며 같이 살자고 제의했습니다. 그 후, 탁 방주님의 전폭적인 지지 속에 공방 일을 익혔습니다. 그 은혜에 보답하고자 현재 탁 방주님 공적비도 제작했습니다.”

사람다운 사람을 위한 장인정신
그 후, 이봉주 옹은 재기했다. 그가 제작한 방짜유기는 국가고위관료를 비롯해 수많은 사람들에게 인정받게 됐다. 그 비결에 대해 그는 꿈과 인내를 언급했다. 실로 건강도 중요하고, 재간도 필요하다. 하지만 그것은 최우선이 아니다. 원대한 목표를 갖고서 끊임없이 전진해야 한다. 일생의 정수를 꼽은 이봉주 옹의 철학이다.
“아무리 재능과 실력을 겸비해도 꿈과 인내가 없으면 헛것입니다. 예컨대 저마다 입문한 분야에서 시원찮다고 해도 신념과 각오를 갖고 버티고 견디면 어느새 저만큼 올라가 있습니다. 목표가 확고하면 억울해도 극복이 되고, 고단해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제가 처음으로 공방에서 기술을 배웠던 시기에도 어려움은 제법 많았습니다. 풍구불기는 물론 새벽에 숯불을 피워놓고 대장들의 심부름을 했습니다. 그들의 비위를 맞춰가며 제대로 일하기 위해 눈치를 살폈습니다.
그렇듯 꿈과 인내가 없었다면 지금의 이봉주 또한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방짜유기를 제작하는 국가에도 모두 방문했습니다. 미국이나 인도에서도 일해보고, 중국에는 수십 번 다녀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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