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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2-08-11 10:4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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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홍주 대표는 대한노래 부르기중앙회 지도교수, 공동체개발원 원장,
디지털서울문화예술대학교 교수, 현재 (재)하남문화재단 대표이사,
(사)한국투명성기구 부회장, 경기도교육청 청렴옴부즈만 대표로 활동중이다.






문홍주 하남문화재단 대표이사를 만나, 그의 약 60여 년간의 삶을 통해 산업교육을 하게 되기까지의 여정과 활동 내용을 들어봤다.

문 대표는 6·25 전쟁이 발발한 해에 경북 고령에서 태어났다. 5세쯤 경남 밀양으로 이사한 것을 비롯하여 경북 흥해, 대구 등 초등학교를 졸업하기까지 세 번째 이사한 대구에서 중, 고, 대학을 다녔다.


그의 아버지는 재력가인 할아버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일본 유학시절 일본의 유명한 신학자였던 우찌무라 간조의 영향을 받아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후 한국신학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목회자의 길로 접어든다. 아버지는 청빈한 목회자의 길을 고집하며 할아버지로부터 일체의 도움을 거절하였기에 중?고등학교 시점 문 대표는 청빈한 목회자의 삶으로 늘 학비 걱정에 시달려야 했다. 그러기에 학교를 선택하는 것도 목회자 자녀에게 장학금을 지원하는 미션스쿨을 우선으로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레크리에이션의 초석을 다지다
과외로 일하며 학비를 벌던 중 문 대표는 사회복지보육시설인 ‘새볕원’에서 합창단 지휘자로 요청받고 첫 지휘자가 되었다. 당시 교회 성가대를 비롯한 대학 음악동아리 ‘도레미하모니클럽’과 ‘대구YMCA 알핀로제요들클럽’ 등을 조직하여 회장을 맡아 운영하고 있었고, 교회 어린이 성가대를 지도하긴 했으나 아르바이트 성격이며 보육시설 어린이 합창단 지휘는 처음이었다. 그 무렵 ‘한국아카데미합창단’ 단원으로도 활동하였는데 전문합창단에서의 합창경험은 대학 합창단 지휘를 맡는 데 초석이 되었으며, 아리아 오르간 제조업체에서 창단한 ‘아리아 합창단’ 지휘 요청을 받고 첫 실업합창단을 지휘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경험들을 통하여 ‘대구YMCA소년소녀들국화합창단’과 사회복지시설의 어린이 합창단인 ‘베다니합창단’과 그 당시 꽤 활발한 활동을 하던 선명회재단 소속의 ‘어린이집합창단’을 맡아 지휘하기도 하였다. 합창지휘와 더불어 그들의 인성 프로그램이나 상담지도 등 자원 활동에도 많은 시간을 쏟아왔던 문 대표는 우리 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제도에 대한 인식을 하게 되었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참길회’라는 자원 활동 단체를 만들었는데 40년이나 지난 지금도 복지시설의 어린이와 노인들을 지원하는 자원 활동 프로그램을 계속하고 있다.

다양한 경험을 통해 사회문제에 눈을 뜨다
문 대표의 20대는 앞서 소개한 활동들을 비롯하여 당시 건전가요 운동을 펼치고 있던 ‘대한노래부르기중앙회’ 전석환 회장으로부터 대구를 대표한 지도자로 위촉받아 그는 전국을 누비며 건전가요 지도활동에 힘을 보태었다. 또한, 대구YMCA 청소년지도자 활동을 통하여 지도력 향상을 위한 다양한 학습과 어린이, 청소년 수련활동 지도 경험을 비롯한 문 대표의 수많은 대학 시절 경험은 삶의 방향을 설정하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된 시기였다. 이는 훗날 문 대표에게 MBC 음악 PD, YMCA 총무, YMCA 간사, 모 기업 전무 등 다양한 러브콜의 기회로 이어졌다. 그러나 졸업 후 군대 영장을 받아놓은 문 대표에겐 그림의 떡이었다.


군 제대 후 전석환 회장의 부름에 오랜 시간 심사숙고 끝에 서울 본부에 가기로 하고 거처를 옮겨 노래 부르기 운동을 직업 삼아 본격적으로 활동해왔다. 그로부터 2년 후 전공분야인 실크의류 제조업체인 삼구통상(주)에서 인력난 극복과 함께 당시 5백여 직원들의 사기진작을 위한 프로그램 담당자가 필요하여 경력 많은 문 대표가 특별 초빙되기도 하였다. 이 후 문 대표는 새로운 터닝 포인트를 맞게 되는데, 고 강원용 목사님의 ‘크리스천아카데미’와 연이 닿아 새로운 분야의 소임을 수행하게 된다. 그곳에서 활동하는 동안 교회와 농촌, 여성, 노동 등 사회의 제 문제에 눈을 뜨며 인생의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었고, 특히 교육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발견하는 계기가 되면서 재충전을 위한 기회를 가지고자 하여 대학원 진학을 결심하게 되었다. 

레크리에이션에 고천문을 도입
공동체를 지향하는 것에 관심이 많았던 문 대표는 대학원에 다니면서 공부도 하고, 본격적 활동을 시작한다. 레크리에이션 지도자로서 강좌를 개척해 나가기 시작하는 때가 1984년 전, 후를 기점으로 하는 이때이다. 초기에 레크리에이션을 시작했기에 많은 후배가 생겨났고, 그 인재들을 육성하며, 강의에 열심히 불리어 다닐 수밖에 없었다. 강의의 주된 주제는 일체감, 공동체, 한마음이었다. 합창과 레크리에이션을 시작으로 점차 문 대표의 교육 영역을 넓혀 한마음 체육대회, 미니 올림픽 대회 등을 하며, 조직이 하나 되는 것에 관심을 두고,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추구하여 레크리에이션 중의 하나인 촛불의식, 캠프파이어 진행을 맡았다.


당시는 북, 장구, 징, 꽹과리 사물놀이 등의 전통놀이를 교육으로 도입하는 시기였는데, 문 대표는 전통 방패연으로 하는 매니지먼트 게임을 개발하였다.
또한, 캠프파이어 프로그램에서는 문 대표만의 독특한 형식을 도입했는데, 캠프파이어 의식할 때, 하늘에 고하는 고천문을 낭독하고 고천문 용지에 직접 불을 붙여 태우는(소지) 방식을 도입해 캠프파이어에 새로운 장을 열었다.


‘크리스천아카데미’에 재직하며 우리 사회의 모순된 현상을 직시하고 이에 맞서는 실천 방안을 고민하던 중 80년대 민요연구회, 민족음악협의회, 민예총 등의 진보적 문예활동을 통하여 문화운동에 동참해왔다. 당시 '민족의 노래, 민중의 노래'의 기치를 내걸고 시작한 민요연구회 창립발기인의 일원으로 참여하여 운영위원과 회장을 역임하며 ‘돌아가리라’, ‘그리움 가는 길 어디쯤’, ‘빈쇠전’, ‘어기야디야’ 등 창작민요 작곡에 열정을 받치며 노래운동을 전개하였다.

독특한 색깔의 공동체 프로그램
젊은 시절 자신이 좋아하는 문화예술 관련 일을 해오는 동안 계속되는 변화에 잘 적응하며 90년대 제2의 전공인 교육과 취미활동인 문화예술이 결합한 내용과 형식을 바탕으로 공동체개발원을 설립하고, 그만의 독특한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교육에 적용한 공동체 프로그램 중심의 교육 사업을 시작하였다. 80~90년대 왕성한 활동을 펼칠 수 있었던 것은 그만의 색깔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80년대부터 틈틈이 대학에 출강하며, 디지털서울문화예술대학교 교수로 다시 대학에 몸을 담게 된다.


문 대표는 2010년 8월에 하남문화예술회관 관장으로 부름을 받아 열심히 소임 중이며, 하남역사박물관을 새로 편입하여 지난 3월에 하남문화재단으로 승격하고, 대표이사로 취임하였다. 이제 그는 삶 대부분이자 취미이기도 한 문화예술 분야에 정착했다. 지난 2년의 임기 중에 신명을 받친 결과 재임을 눈앞에 두고 있다. 70~90년대 왕성한 공동체 프로그램 활동으로 모두를 하나 되게 했던 그의 눈에는 문화예술을 향한 열정과 사랑이 가득 담겨 있었다.


글+사진 김현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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