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살면서 활동하는 모든 형식을‘놀이’라고 하는 개념에서 깊이 파고들어 가보면 모든 것은‘놀이’에서 새로운 창조가 시작된다. 놀이가 함께하는 행위 속에서 창조의 본질적인 역할을 놀이가 다양하게 분담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가 있다. 놀이는 언어를 사용하는 내용에도, 예술에도, 철학적 사색에도, 사회생활의 어디에도 나타난다. 놀이는 감성과 뇌에 영양을 공급하는 유통라인과 같은 역할을 하면서 동시에 삶에 활력을 주는 유모어다.
그리고 놀이는 파괴와 재창조의 근본적 소산이며 창조의 원천이다.
학구적 지성에서 새로운 창조가 얻어지는 일은 거의 없다. 농담하거나 게임을 즐기는 보편적인 생활의 와중에서 창작의 결과물이 생산된다. 창조성의 신선한 시발점으로 창조를 위한 정신 건강을 윤택하게 해주는 촉매 작용을 하는 게 놀이이다. 우리가 의식하거나 인식하지 못하는 순간에 이처럼 지극히 보편적인 대중문화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것이 놀이의 산물이다.
하지만 누구나가 인식하고 있는 창조성이 인류의 역사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에는 평가하면서도 명확하게 잡기 어려운 개념이 창조성이다. 창조성은 창조성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창조성은 특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모든 사물을 모방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창조적 변화를 모색하여 만들어 놓은 이미지에 만든 사람의 주관이 있기 때문에 창조성은 특별한 것처럼 명료하게 정의할 수는 없는 게 당연하다. 작은 에피소드에도 얼마든지 산재해 있는 놀이는 놀이하는 시간에 만족한 즐거움을 제공하는 놀이일 뿐이다. 다만 놀이를 할 때 특별한 것도 아닌 그 무엇인가에 열정적으로 몰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창작할 때도 열정을 쏟는다. 우리는 그 열정 때문에 창조라는 형식의 다양한 예술작품을 창작하는 것이다.
창의 교육은 호기심으로 흥미로운 것을 찾아내도록 도와주고 강요가 아닌 자율성에 의해 대상을 표현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자율성에 의해 자기의 생각을 표현하게 하려면 교육자의 폭넓은 언어 영역을 확장하여 이해시키고 이해시키는 역할이 선행되어야 하고 기존의 양식이나 교육적으로 형식화 된 방법론을 답습하도록 하는 것은 창의성을 퇴보시키는 우를 범하도록 도와주는 꼴이 되고 말 것이다.
창조는 자연을 모방하고 한편으로는 그 모방을 깨는 것이다. 창조는 자연에서 모방하는 것처럼 일상의 이야기에서 그리고 일상의 사물에서 찾고 과감한 실험과 실수를 하면서 상상력을 끌어내는 것이다. 또한 많은 책을 읽거나 여행을 하는 것은 새로운 것을 찾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눈을 갖거나 새로운 방법론을 경험으로 터득하는 것이다. 찾는 것은 발견이다. 관찰은 일종의 내가 가진 창의적 방법론으로 불필요한 것을 여과하고 선택하는 눈을 갖는 것이다.
교육자는 가르치는 지도자의 역할에서 동반자로서 결과물을 놓고 자신의 의견을 전달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창의성은 카멜레온과 같은 개념이다.
창의성의 제일 큰 적은 상식이며 창의성은 강렬하고 생생하며 시시각각 변한다. 창의적 상상력은 어디서 끌어오거나 잡아두거나 의지로 컴퓨터로 검색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창조는 흥미를 유발시키는 어떤 대상에 침투하여 의문을 가지고 관찰의 과정을 거치면서 창조적 상상력을 제공하는 초기단계의 허브공간이다. 이러한 허브공간에서 상상력과 연습이 어우러지는 장을 마련함으로써 처음으로 창조가 성립되는 것이다. 그리고 자율에 의한 의지로 하고 싶은 것을 하도록 간섭하지 않고 내버려 두는 것이다.
자율성에 맡기면 필요한 것이나 대상에 침투하여 스스로 사물의 대상과 함께 발효되어버린다. 발효의 과정은 하나 더하기 하나가 다른 하나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또한 통찰력과 직관을 끌어내는 연습이 동반되어야 한다. 우리가 생활하는 주변에서 매일같이 쏟아지는 다양한 사건이나 사물에서 소위 새롭다고 하는 창작 예술로 승화시키기 위해서 예리한 직관이 없다면 창조는 있을 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오늘날은 디지털화된 시대이다. 하지만 디지털 시대인 오늘날에도 시각 언어가 뇌에 있다. 창조성은 일상적인 사소한 것으로 시작하여 학문적인 공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새롭게 지각하는 능력이나 사물을 새롭게 보려고 하며 생각하는 일이다. 이러한 방법론의 사고는 아날로그의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사물을 시각화하는 것처럼 뇌에 통찰하는 힘을 작용시키는 통로가 디지털로는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인지한다면 예술 교육이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와 같은 사고방식이 기존의 방법론을 깨는 일이라 생각한다. 가르치려고 한다기보다 의문을 갖게 하고 통찰력을 키우고 그것들에 대한 반응을 자율적으로 실행하도록 해야 한다. 또한 의도가 명확하도록 하고 사물을 바라보는 이른바 투시적 관찰력을 키워주어야 한다.
폴 세잔은 그의 작품“사과와 비스켓”에서 뉴턴의 중력에 대한 그의 작가적 태도를 엿볼 수 있다. 중력 작용의 논리에 의하면 사과가 지상으로 떨어져야 하는데도 떨어지지 않는 사과들을 그려놓은 것이다. 세잔은 뉴턴을 무력화하려고 일부러 사과 그리는 것을 선택했는지도 모른다.
생물학적으로 자연의 구조를 바라보면 흥미롭기 이를 데 없다. 자연은 모든 것의 근원이다. 수학이나 과학도 자연의 소산이며 산업의 원인 제공자도 자연이다.
또한, 여러 가지 재료로 만들고자 하는 다양한 형태를 손으로 제작하는 것은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 커뮤니케이션이며 스포츠 능력을 키우는 것도 일종의 체험 학습이다. 만드는 연습은 개인의 사고로 조형적 이상을 실현하는 방법이다. 그렇다면 예술품을 감상하는 교육은 어떤 결과를 가져올까? 만드는 것과 이론적으로 미술 작품을 공부하는 것이 밀접한 관계를 갖는 것처럼 생각할 수가 있다. 전혀 관계가 없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만드는 것은 만들면서 대상에 대해서 생각하고 응용하는 것이며 각 개인이 가지고 있는 창의적인 차별성 있는 독특한 작업이다. 이에 비교해보면 미술관에 가서 얻는 교육의 작품 감상은 그저 작품 감상인 것에 불과하다.
미술은 사물과 인간의 어떤 관계적 사이에서 미술작품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미술은 특수한 취급을 받는 충돌로 발생한다. 미술은 이러한 기묘한 심리현상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창의성은 상상할 수 없는 대상, 생각이 미치지 않는 사소한 에피소드나 어떤 사건과의 만남이나 놀이, 논리적 학문, 기존을 깨는 많은 체험과 사고에서 이루어진다. 창의적 교육을 이러한 맥락에서 접근해 본다면 교육자도 교육을 받는 사람들에게도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글 화가 전수천
▶ 화가 전수천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교수
미국 뉴욕 프랫 인스티튜트 석사
일본 도쿄 무사시노 미술대학
유화 전공과 와코대학 예술학사 졸업
1995년 베니스 비엔날레 특별상
1997년 최우수 예술인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