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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2-03-10 13:3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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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공기가 무겁다. 노령화비율이며 장기실업률, 유가도 걱정거리다. 우리나라만 그런 것이 아니다. 미국 중심의 세계체제 자체가 이미 심각한 한계에 직면했다는 지적도 끊이지 않는다. 최신의 지식과 정보를 총동원해도 돌파구를 찾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고개를 돌려 잠시 우리역사의 한 풍경을 바라보자.
태평성세라 불리는 세종의 치세. 막연히 짐작하는 것과 달리, 그 출발점은 시계(視界) 제로였다. 국내외 정세가 불안정했던 것이다. 명나라와의 관계는 앞날이 불투명했고, 북방의 여진족과 남방의 왜인들이 끊임없이 침략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국내사정도 녹록치 않아 남몰래 고려왕조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며 역전을 노리는 사람들도 많았다. 자연히 조정 분위기는 어수선하였다. 통치기구와 문물제도가 정비되지 못하여 시행착오가 되풀이 되고, 사방에선 백성들의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도약이 절실히 요구되는 시점이었다.
세종은 “융성한 시대가 있다면, 그것은 인재가 있어 그런 것”이라며 흥망이 오직 인재에 달렸다고 확신했다. 왕은 집현전을 설치해 인재양성에 박차를 가했다.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이다. 여기서 한 가지 따로 강조하고 싶은 사항이 있다. 왕은 인재를 기르는 방법에 대해서도 진진한 관심을 가졌다는 점이다. 그는 집현전에 명하여 중국과 한국의 역대 제왕들이 인재를 어떻게 기르고 등용했는지를 연구하도록 했다.(실록, 세종18년 2월 30일) 그때도 연구와 개발은 동전의 양면이었다.
다방면에 걸친 세종의 인재개발 노력으로 수백 명의 인재가 출현했다. 황희와 맹사성은 명재상으로 이름을 날렸고, 김종서와 조말생 등은 국방을 도맡았다. 과학기술 분야에는 장영실이라는 천재가 등장하여 측우기와 해시계 등 세계 최고의 발명품을 연달아 쏟아냈다. 박연은 아악을 정리하고 정간보라는 독창적인 채보법을 고안해냈다. 세종시대는 태평을 구가했고, 사방의 외국인들이 귀순해 들어왔다. 당시 중국의 조정대신들조차 조선을 부러워했다.
세종은 인재를 길러 나라의 운명을 바꿔놓았다. 성공의 비결은 왕의 독특한 인재관에 있었다. 세상에 완벽한 인재는 없는 법이다. 누구에게나 단점은 있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세종은 “단점을 버리고 장점을 취하였다(棄短錄長)”는 원칙을 고수하고, 인재의 전문능력을 키운 결과, 당시로서는 세계최강의 드림팀을 이끌게 되었다. 
가령 장영실은 노비신분이었지만 신분에 구애받지 않았고, 김종서와 조말생에게는 뇌물을 좋아한다는 혐의가 있었으나 세종은 그들의 책임감과 과단성을 믿고 국경을 맡겼다. 황희의 는 수뢰혐의와 직권 남용은 물론, 살인죄를 감추려 한데다가 재상의 부녀를 간통한 혐의까지 있었다. 한데도 그의 정치적 조율능력을 확신한 세종은 그를 명재상으로 거듭나게 하였다. 훗날 율곡 이이는 세종의 인재관리 능력을 옳게 평가했다. “대왕은 인재를 자신의 몸처럼 아끼셨다. 출신에 구애되지 않으셨고, 각자의 전문적인 능력을 배양하셨다. 누구도 참소와 이간질을 못하게 틈을 주지 않으셨다.”(이이, 율곡전서)
세종은 평소 “인재가 길에 버려진다면 왕의 수치다”라는 말을 되풀이하였다. 국가든 기업이든 경쟁력은 결국 사람에게서 나온다. 뒤돌아보면 흘러간 우리역사 속에는 인재경영의 비결이 도처에 숨어있다. HRD에 관한 외국의 새로운 이론도 중요하지만, 우리 것을 홀대하면 도리어 손해를 볼 것이다. 문화에는 그 나름의 유전인자가 있다고 한다. 되새길만한 말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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